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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떼굴이의 걷기운동

강진 전라 병영성 하멜기념관/하멜 병영길위를 걷다.

by 홍나와 떼굴이 2019.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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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강진에 도착해서

지인을 기다리는 동안 시간이 남아

강진만 생태공원 가기전 잠시 들렸던 곳이다

서둘러 도느라 하멜기념관 내부는 들어가보지 못했고

전라 병영성과 하멜기념관에  대한 역사 공부는

포스팅을 하면서 공부할 수 있었다.

 

강진의 전라 병영성은

조선조 600년 간 호남과 제주도 53주 6진을 통할한 육군의 총 지휘부로

1417년(태종 17) 본래 광산현에 설치되어 있던 병마절도사영을 이설한 성이다.

초대 병사인 마천목장군이 꿈속에 계시를 받아

눈()의 자국을 따라 축조하였다 하여 설성이라고도 하는데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대동지지"나 "색지"등에 따르면 둘레 2,820척, 높이 18척,

옹성 12개소, 연못 5개소, 우물 9개소, 포루 2개소였고

성문 4개소, 연회장, 객사 등 15동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1599년(선조 32) 일시 장흥으로 이설되었다가

1604년 다시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제주도에 표착했던 네델란드인 하멜이 이곳으로 압송되어

8년여 동안을 억류생활 했던 곳이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으로 병영성이 함락되어 막대한 피해를 입었으며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갑오경장때 폐영되었다.

전라병영성지는 당초 1992년 3월 9일

전라남도 기념물 제1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다가

1997년 국가사적 제397호로 지정되었다.

당시의 성곽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중요성과 의의를 한차원 높이기 위해

성곽 등을 복원하였으며, 관련유적으로

하멜체류지, 한골목, 병영홍교, 비자나무, 은행나무 등이 있다.

 

전라남도 강진군 병영면 성동리에 있는

조선시대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영성

. 사적 제397호. 일명 설성 혹은 세류성이라고도 한다.

 

특히 이 성에서는 1656년부터 1663년까지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이 억류되어 생활한 바 있다.

성벽은 둘레 1,060m이고, 높이가 약 3.5m로 남아 있으며,

남북으로 길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이다.

 

동서남북에 옹성(甕城 : 성문의 앞을 가리어 빙 둘러친 성문을 방어하는 작은 성)을 갖춘 문터,

그리고 4개의 모서리와 동벽 및 서벽에 2개씩의

치성(雉城 : 성벽에서 돌출시켜 쌓은 성벽)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서쪽에 두 곳의 배수구 시설이 있다.

성벽은 조선시대 읍성과 평지의 진영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축조방법이 잘 남아 있다.

배후에는 해발 561m의 수인산(修仁山)에 산성이 있다.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 때 왜구가 달량진으로 쳐들어오자

병사 원적이 달량진성을 구원하기 위하여 출전하였으나

전사하고 성이 함락된 바 있으며,

이후 1581년(선조 14)까지 대대적인 수축이 있었다.

동학혁명기인 1894년 12월에는 동학농민군이 장흥성을 함락하고,

이어 병영성까지 함락한 바 있다.

당시 병영성은 인근 4개면 57개 마을을 관할하는 도회로서

유사시에 대비한 9개의 우물과 5개의 연못을 마련해 두었었다.

 

 

 

조선시대에 축조된 전라도 병마절도사의 병영성.

1417년(태종 17)에 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에 있던 병영을

강진으로 옮겨 병사 마천목이 쌓았다고 하는데,

당시 성의 둘레가 2,820척이고 높이가 10척 8촌이라 하였다.

1599년(선조 32)에 병영을 일시 장흥으로 옮겼다가

5년 만에 성곽을 수리하여 다시 병영이 되었는데,

특히 이 성에서는 1656년(효종 7)부터 1663년(현종 4)까지

네델란드인 하멜 일행이 억류되어 생활한 바 있다.

 

현재 성은 남북으로 기다란 장방형에 가까운 평면으로,

성벽은 둘레 1,060m이고, 높이가 약 3.5m이다.

동서남북에 옹성을 갖춘 성문터와 동벽 및

서벽에 2개씩의 치성의 흔적이 남아 있고,

남서쪽에 2개소의 배수구 시설이 있다.

조선시대 읍성과 평지의 진영에 일반적으로 적용된 축조방법이

잘 남아 있어 당시의 성곽 축조술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또 2층 누로 이뤄진 남문·동문·북문 등이 있었고,

각종 관사와 누정은 일제강점기에 모두 훼철되었다.

평지에 축조된 성으로 남북으로 약간 긴 직사각형이며,

총 길이는 1,650m이다. 성의 형태는 남북이 길고

동벽의 길이가 서벽에 비해 약간 짧은 부정형의 형태이다.

성곽의 서북쪽에 개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 개천을 해자로 보는 견해도 있다. 

남문인 진남루

 

축조 방법은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을

모두 성돌로 쌓는 협축기법을 사용하였다.

성돌은 대부분 자연석으로 바깥면에는 다듬은 돌을 썼고,

보통의 성과 마찬가지로 하부는 큰 돌을 놓고

위로 올라가면서 작은 돌을 쌓는 방법을 썼다.

병영초등학교의 담장으로 이용되고 있는 성벽은

너비가 2m 이상이 될 정도로 넓게 안쪽까지 견실하게 마무리하였다.

반면 박삼옥 댁에 있는 성벽 중 일부는 외벽만을 쌓고

안쪽으로 흙을 쌓아 내탁하는 편축도 나타난다.

 

병영성은 인근 4개면 57개 마을을 관할하는 도회로서

성안에는 객사인 청심각()과 그 후신인 망미루(),

문루인 공무루()를 비롯하여 아사()인 운주헌()과

그 문루인 제승루(), 남문인 진남루()와

군기고를 비롯한 각종의 공공건물이 즐비하였고,

9개의 우물과 5개의 연못이 있었다. 하마비()를

비롯한 3개의 병사 선정비가 남아 있다.

 

 

남도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웬 풍차인가.

사람과 잇댄 첫 이야기의 주인공은 눈 푸른 이방인이다.

은둔의 나라 조선을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 표류기>의 저자인

헨드릭 하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선원인 하멜은 13년간 조선에 머물렀다.

이 중 7년간 기거한 데가 병영면의 전라병영성 일대다.

말이 기거이지 억류된 하멜 일행은 화포 제작 등 각종 노역에 유치됐다. 

기막힌 인연도 있었는데 낯선 땅에서 같은 네덜란드인을 만난 것.

20여년 전 하멜과 비슷한 경로로 조선에 흘러들어온 박연(얀 야너스 벨테브레)과의 조우다.

박연 역시 하멜처럼 일본 나가사키 항해 중 제주도에 표착했다.  

 

하멜기념관주변으로

네덜란드식 담장과 풍차도 있어

볼거리 가득한 하멜 병영길

위를 걸어 보았다

 

 

캐릭터 하음이 

하음이란 "하멜의 마음"이란 뜻으로

하멜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함께

공감해보기 위해 만든 캐릭터이다.

 

 

차와 소품을 판매하는

작은 상점도... 

 

 

하멜기념관 내부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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