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홍나의 여행

정선 화암동굴

by 홍나와 떼굴이 2021. 8. 20.
반응형

과거에 화암동굴은

금을 캐던 천포광산이었다.

금을 캐고 남은 광산이 지금은

화암동굴로 이름을 바꿔달고

'테마형 동굴 관광지'로 변신했다.

 

"금과 대자연의 만남" 이 주제로,

기본 콘셉트는 "과거 금을 캐던

현장을 직접 몸으로 체험하고 동시에

자연이 빚어낸 종유석 동굴의

아름다움을 만끽한다"

는 것이다.

 

총 관람길이는 1.803m로서

소요되는 시간은

1시간 30분이다.

 

지난주 다녀왔는데

구석구석 소개해 본다.

 

 

 

《화암동굴에 얽힌 사연》

 

화암동굴에 도깨비가 산다.

지하 깊은 동굴 속이다.

그곳은 현기증 나게 가파른

365개의 계단을 무사히 통과해야만

도달할 수 있다. 좀 쉽게 가려면

주문을 외우면 될까.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나라

방망이를 두드리면 무엇이 될까

금 나와라 와라 뚝딱

은 나와라와라 뚝딱

도깨비는 우리 민족 정서에 

깊이 뿌리내린 친근한 캐릭터다.

순진하고 장난기가 많아

사람에게 골탕 먹이기를 즐긴다.

 

심술궂은 장난을 쳐도 악귀처럼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

꾀가 없고 순진하여 영악한

인간에게 잘 속아 넘어간다.

 

약이 올라 실수를 만회해

보려고 하지만 번번이

인간을 돕는 꼴이 된다.

어찌 보면 세상 나쁜 인간보다

오히려 도깨비가 훨씬 인간적이다.

그래서 도깨비가 사람들과 어울린

세월도 동굴만큼 오래됐을지 모른다.

이제 도깨비를 만나러 갈 차례다.

사악한 인간은 심판하고

선한 사람은 도와줄

인류의 오랜 친구.

 

동굴은 한마디로 타임머신 같다.

수억 년에서 수만 년의 나이를

간직한 동굴 속은 시간을 거슬러

저절로 생성된 자연의 신비와

장엄함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도 활발하게 생장 중인

화암 돌굴에선 신비와 경외심을 

느끼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다.

 

과거로 가는 시간의 터널을 지나

흰 옷 입은 사람들을 만난다.

그들의 흰옷에 암흑이 배어

새까매진 삶의 애환을

들여다본다.

《역사의 장》

 

암흑의 세계.

금빛을 찾아 동굴 속을

헤매며 깊숙이 더 깊숙이

파고 들어가야만 만나게 된다는

'노다지 궁전', 그러나

'노다지'는,

우리 조선 사람은

'손도 대지 말라'

침략자들의 엄포였다.

 

순수한 백성이던

그들에겐 나라가 없었다.

빼앗긴 나라에선 숨 쉬는 것도

힘든 노동이었고 슬픔이었고

아픔이었다.

그래도 살아야 했다.

어둠을 캐내고 빛을 찾아

동굴 속을 파헤쳤다.

위험을 무릎 쓴 노역은 

허황한 꿈이 아니라

생존의 방법이었고

수단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삶은

어둠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가난하고 힘없는 나라의

슬픔 백성이었기 때문이다.

정선지방에 분포돼 있는

산호동굴, 용소 동굴, 매 둔동 굴 등

많은 동굴은 오랜 세월 침식작용으로

발생한 석회동굴이다.

 

화암동굴은 일제강점기엔

금을 캐내던 천포광산이었다.

1934년 석회암 동굴이 

발견되었다.

금광 갱도 하나가

무너졌다.

광부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어마어마한 공간과 만났다.

불을 밝혔다. 그곳에는 세월과

물과 석회암이 빚은 아름다운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하지만 금은 그곳에 없었다.

금맥 없는 종유굴은 

무가치한 동굴이라

버림받았다.

천포광산은

해방과 함께 폐광됐다.

주민들은 1980년까지 띄엄띄엄

개인적으로 금을 내다 팔았다.

1990년대 들어 바로 그 무관심했던

종유굴의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고,

현재는 국가지정 천연기념물로

승겼됐다. 금광보다 종유굴의 가치가

더 높게 역사에 기록된 것이다.

박종인의 [땅의 역사]를 보면,

화암동굴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1929년 미국 뉴욕

증시 폭락을 시작으로

세계는 경제 불황불황

늪에 빠졌다.

돈의 가치는 바닥으로 

추락했고 금값은 치솟았다.

 

군수물자를 수입하던

제국주의 일본은 식민 조선에

대대적인 금광 개발을 시작했다.

그해 농사는 대풍이었지만,

조선 농민들은 팔 곳 없는

쌀을 버리고 금광으로 들어갔다.

'황금에 미친'시대가 도래했다.

그 미친바람을 

제대로 탄 이가 있었다.

평북 사람 김정숙이었다.

1896년 평원에서 태어난 

김정숙은 열다섯 살에 시집을 갔다.

남편은 금광꾼이었다.

금을 찾아 헤매는 남편을 따라

팔도를 헤매며 이리저리

땅속을 파 내려갔다.

 

그러다

흘러 흘러 정선에 있는

천포광산으로 왔다.

그런데 8년 만에 이곳에서

금맥이 터져버렸다.

1932년 일이다.

누구나 노다지

얘기를 하던 시절이었다.

김정숙은 성공한 금광꾼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2년 뒤 김정숙은 이가 갈리게

고생한 금광을 팔아치우고

금광의 역사에서 사라졌다.

매각 금액은 20만 원,

지금 돈으로 240역 원이다.

 

김정숙으로부터 천포광산을

매입한 회사는 '소화 광업'이었다.

총독부가 펴낸 '광구 일람'에는

소화 광업 사주 이름이

'박춘금'이라 적혀 있다.

 

1949년 혁신 출판사라는

곳에서 펴낸 저자 미상의

'민족정기의 심판'이라는 책에는

박춘금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경남 1891년생.

동족 학살을 기도한 악귀"

소화 광업 사장 박춘금은

뼛속까지 친일파였다.

경남 밀양 사람인 박춘금은

어릴 적 일본으로 건너가

주점 심부름꾼을 하면서

일본말을 배웠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시체를

청소하면서 일본인 눈에 든다.

이후 제대로 된

친일행각을 벌여나갔다.

동족에게 온갖 패악질을

일삼던 박춘금은 해방 직전 

전국 반일, 항일 인사 30만 명을

처형할 계획이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에서 패했고,

해방 후 박춘금은 일본으로 도망갔다.

1963년 잠시 귀국했을 때 한다는 말이

"독립국이 된 조국에 돌아와 떳떳하다"였다.

박춘금은 1973년 죽어서 유족이 몰래

고향 밀양에 묻었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라는 단체가

송덕비를 세웠다.

2002년 이를 알아낸 밀양 시민들이

비석을 파괴했다.

2006년 무덤 위로 

도로가 나고 무덤도 사라졌다.

《금의 세계》

 

국내 최초로 테마형 동굴로

상부갱도 515m 구간에는

금광맥의 발견에서부터

금광석의 채취까지의 

전 과정을 생생하게 

재현해 놓았으며,

미디어사 파드를 도입하여

환상의 나라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게 한다.

 

 

 

 

 

 

 

 

《천연 종유동굴-석회동굴》

금광을 보는 것만으로도

화암동굴을 제대로 봤다고

할 수가 없다.

 

마지막에 자연이 빚어 놓은

석회암 동굴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화암동굴에는 넓이가 2.800 m2

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회석 광장이 있다.

 

이곳에는 동양 최대 규모의

유석 폭포, 마리아상, 부처상, 장군석,

석화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동굴생성물이 있다.

 

 

 

 

 

 

 

 

《동화의 나라》

 

 

또한 동화 속 주인공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포토존이 있어

많은 볼거리를

제공한다.

 

 

 

 

 

 

 

 

 

 

 

 

 

 

 

 

 

 

 

 

 

 

 

 

 

 

 

 

 

 

 

 

 

 

 

 

 

문화재청은

강원도 기념물인

정선 화암동굴을

국가지정문화재로 승격,

천연기념물 제557호로

지정했다.

 

화암동굴은 석회동굴로

현재까지 확인된 길이만

320m에 이른다.

 

공개되는 대형광장에는

하얀색 석순, 석주, 종유석,

곡석(사방으로 뒤틀려 발달하는 퇴적물),

석화(꽃 모양 퇴적물)등이

현재도 자라고 있다.

 

미공개 구간의 석화는

국내 다른 석회동굴에서

발견되는 것과는 구별되는

독특한 모양과 색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는다.

 

화암동굴은 현재 역사의 장,

동화의 나라, 금의 세계 등

국내 최초 테마형 동굴로

운영 중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