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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마음공부

고요함의 지혜: 에크하르트 톨레 10. 고통과 고통의 끝

by 홍나와 떼굴이 2022.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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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이 서로 그물망처럼 얽혀 있음을 불교에서는 알고 있었다. 이제 물리학자들이 그것을 증명했다. 어떤 사건이나 존재도 홀로 분리되어 일어날 수 없다. 다만 겉으로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판단과 분류가 많아질수록 분리와 고립도 늘어난다. 생각을 통해 삶의 전체성은 조각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생각을 만들어낸 것도 삶의 전체성이다. 상의상관성속에 존재하는 생명 그물망인 우주의 일부이다.

 

이것은 지금의 현실이 무엇이든 그리될 수 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

 

언뜻 보기에 말도 안되는 사건이 우주의 전체성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인지 우리는 아무래도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광대한 우주의 전체성 안에서 그 사건은 부득이한 필연이었다고 인정해버리면 당신은 현실을 받아들이는 제일보를 내디딘 것이다. 그것의 삶의 전체성과 다시 한번 조화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진정한 자유를 원하는가? 고통을 끝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체험하는 것이 무엇이든 마치 내 스스로 그것을 온전히 선택한 듯이 살아가라.

 

그렇게 나의 내면을 지금 이 순간에 조율하는 것이 고통을 끝내는 길이다.

 

고통은 정말 필요한 것인가? 필요하기도 하고 필요하지 않기도 하다.

 

지금까지 겪은 고통이 없었다면 나라는 사람은 깊이가 부족했을 것이다. 겸손과 자비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지금 이 책도 읽고 있지 않을 것이다. 고통은 에고의 단단한 껍질을 부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고통이 목적을 다하는 순간이 온다. 나에게 더 이상 고통은 필요 없다고 깨닫는 그 순간까지만 고통은 필요한 것이다.

 

불행은 생각이 만들어낸 나의 정체성을 필요로 한다. 나의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불행은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나의 불행에서 시간을 제거해버리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이 순간의 '그러함' 뿐이다.

 

그러한 것은 무엇인가? 이 순간 내가 낙담, 성마름, 긴장, 분노를 느낀다는 것, 심지어 역겨움까지 느낀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행이 아니다. 개인적인 문제도 아니다. 인간의 고통에 개인적인 것은 없다. 다만 몸 안 어디에선가 느끼는 강렬한 압박감과 에너지일 뿐이다. 그것이 나의 전념에 닿았을 때 감정은 그저 감정으로 남을 뿐 생각으로 변하여 현실에 대립하는 불행한 '나'를 만들지 않는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허용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라.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생각 하나하나를 다 사실이라고 여길 때 많은 고통과 불행이 일어난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주변 상황이 아니다. 육체적 고통은 줄 수 있겠지만 그것들이 나에게 불행을 주지는 않는다.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나의 생각이다. 상황에 대한 나의 주관적 판단, 나의 이야기가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내가 무의식중에 '생각=나'라고 동일하게 여겼던 습관을 타파할 수 있다.

 

"날씨도 거지같군."

 

"애프터 신청도 안 해주다니 그 남자는 밥맛이야."

 

"그녀는 나를 실망시켰어."

 

내가 하는 혼잣말도 남들과 나누는 사소한 이야기도 불평불만인 경우가 많다. 그것은 위축되는 자아상을 보강하기 위해 무의식중에 만들어지며 언제나 나는 '옳은 쪽', 남이나 사물은 '그른 쪽'이 되어야 한다. 내가 옳다는 생각은 우월감을 주어 거짓 자아를 키운다. 그로 인해 적을 만든다. 그렇다. 에고는 자신의 경계선을 정의해줄 적이 필요하다. 때로는 날씨마저도 적의 역할을 한다.

 

습관적인 비판과 감정적 위축 때문에 내 삶에 들어오는 사람과 사건에 나는 늘 대립했다. 이것은 모두가 스스로 자초한 고통임에도 불구하고 나만 그것을 모르고 있다. 에고가 만족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고가 가장 좋아하는 엑세서리는 불평과 대립이다.

 

-에크하르트톨레

내가 만들어낸 이야기가 없다면 삶은 얼마나 단순 소박할까?

 

"지금 비가 온다."

 

"그 남자는 전화를 하지 않았다."

 

"나는 거기 갔다. 그녀는 오지 않았다."

 

고통스러울 때, 불행할 때 지금 이 순간의 현실과 온전히 함께 머물라. 지금 이 순간의 드넓은 공간 안에서는 불행이나 고통이 살아남지 못한다.

 

주어진 상황을 마음속으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 '나쁜것'으로 명명하고 분류할 때 고통은 시작된다. 당신은 주어진 상황을 원망하고, 원망은 그것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들어 대립하는 '나'를 이끌어낸다.

 

명명과 분류는 습관화된 것이지만 타파할 수도 있다. 먼저 작은 것부터 '명명하지 않는' 연습을 하라. 예를 들어 비행기를 놓치거나 컵을 깻거나 진창에 넘어졌을 때, 그것을 '나쁜 것' '고통스러운 것'으로 명명하지 않은 것이다. 그 순간의 '그러함'을 즉시 받아들이는 것이다.

 

주어진 상황을 나쁜 것으로 명명할 때 내면에 정신적 위축이 일어난다. 하지만 아무런 이름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는 순간 놀라운 힘이 내면에 생긴다.

 

정신적 위축은 삶 자체의 힘을 차단시킨다.

 

그들은 선악을 판단하는 지식의 나무에서 과실을 따먹었다.

 

하지만 이제 선악을 넘어서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이 다가오든 '좋은 것' '나쁜 것'이란 명명을 삼가야 한다. 습관적 명명을 넘어설 때 우주의 힘이 나를 통해 작용한다. 어떤 체험이 다가오든 대립하지 않고 수용하는 관계를 이룰 때 전에는 '나쁜 것'이라 부르던 것들이 삶 자체의 힘을 통하여 당장은 아니더라도 빠른 시간에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어진 체험을 '나쁜 것'으로 명명하지 않을 때, 내면으로 받아들이면서 '예'라고 말할 때, 상황을 있는 그대로 놓아둘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살펴보라.

 

나에게 주어진 삶이 어떤 것이든 그것을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나는 어떤 기분이 될까? 지금 이 순간.

 

삶에는 포착하기 힘든 고통도 있고, 분명한 고통도 있다. 이들은 너무나 '정상적'이어서 대체로 고통으로 인식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에고에게는 만족스럽기까지 하다. 짜증, 조급함, 분노를 비롯하여 사물이나 사람에 대한 불만, 원한, 불평 같은 것들.

 

그런 온갖 형태의 고통이 생기는 순간 바로 알아차리는 법을 당신을 배울 수 있다. 그러면 이 순간 당신 스스로 고통을 만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스스로 고통을 만드는 습관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고통을 만들어준다. 이런 무의식적인 마음 양상은 고통이 일어나는 대로 알아차리는 인식 작용을 통해 멈출 수 있다.

 

자신의 마음을 명료히 보면서 스스로 고통을 만들 수는 없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다. 겉으로 보기에 '나쁜 것' '악한 것'으로 보이는 모든 조건과 사람과 상황 뒤에는 커다란 선이 감추어져 있다. 내 안과 밖의 현실을 내면에서 받아들일 때 그것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낸다.

 

'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인류 최고의 진리 중 하나이다.

 

대화 하나

 

A:현실을 받아들여라.

B: 나는 정말 그럴 수 없어. 정말 짜증나고 화가 나.

A: 그럼 그런 현실을 받아들여.

B: 내가 짜증나고 화난다는 걸 받아들여? 내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

A: 그래. 받아들일 수 없다는 너의 마음에 받아들이는 마음을 가져가. 순응할 수 없다는 너의 마음에 순응하는 마음을 가져가.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그냥 지켜봐.

 

만성적인 육체의 통증은 가장 엄한 스승이라 할 수 있다. 그 스승은 '저항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고 가르친다.

 

고통받지 않으려는 마음은 지극히 정상이다. 하지만 그런 저항을 놓아버리면 그래서 고통이 거기 있도록 허용하면 내면에서 고통이 미약하게나마 분리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와 고통 사이에 공간이 생긴 것이다. 이것은 내가 의식하면서 기꺼이 고통을 받는다는 뜻이다. 의식적으로 고통을 받을 때 육체의 통증은 내 안에 있는 에고를 빠르게 불태워버린다. 에고는 대부분 저항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극도의 육체적 장애도 마찬가지다.

 

'나의 고통을 신에게 바친다'는 표현이 바로 이것이다.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십자가의 상징적 형태에 담겨 있는 깊은 보편적 진리를 이해할 수는 있을 것이다.십자가는 고문 기구이다. 그것은 인간이 겪는 최악의 고통과 한계 그리고 무력함을 상징한다. 그런데 난데없이 인간이 순응을 하는 것이다. 기꺼이 고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순응의 말까지 한다. '제 뜻이 아니라 당신 뜻대로 하소서.' 바로 그 순간 고문 기구인 십자가는 감추었던 얼굴을 드러낸다. 바로 신을 상징하는 성물이 되는 것이다.

 

삶의 초월적인 차원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 보였던 것이 이제 순응을 통해서 그 차원으로 들어가는 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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