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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마음공부

고요함의 지혜: 에크하르트 톨레 9. 죽음과 영원

by 홍나와 떼굴이 2022. 9.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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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야생의 숲 속을 지나노라면 온갖 생명이 풍요롭다. 하지만 몇 발자국마다 쓰러진 나무들. 삭아 들어가는 나뭇등걸, 썩어가는 나뭇잎이 있어 물질의 해체를 보게 된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삶과 죽음이 동시에 존재한다.

 

하지만 좀 더 깊이 살펴보면 삭아 들어가는 둥치와 썩어가는 나뭇잎은 새 생명을 태어나게 할 뿐만 아니라 썩어가는 과정에서도 생명으로 가득한 것을 알 수 있다. 미생물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분자들이 스스로 재배치되고 있다. 그곳 어디에도 죽음은 없다. 다만 생명의 형태가 바뀌는 변태만이 있을 뿐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죽음은 삶의 반대가 아니다. 삶에는 반대가 없다. 죽음의 반대는 탄생이다. 그리고 삶은 영원하다.

 

역사를 통해 현자들과 시인들은 인간의 삶이 꿈과 같음을 인식하였다. 겉으로는 그렇게 탄탄하고 현실인 듯 보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나 순간적이라서 한시라도 사라질 수 있는 그런 것 말이다.

 

죽음의 순간에 지나간 삶을 뒤돌아본다면 마치 이제 막 끝나려는 꿈과도 같을 것이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진정 존재하는 실체는 있을 것이다. 꿈이 일어나는 의식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끔은 없을 테니까.

 

그 의식은 몸이 만드는 것인가. 또는 의식이 몸이라는 꿈을 만드는 것인가? 아니면 다른 이의 꿈을 만드는가?

 

임사체험을 겪은 사람들은 왜 대부분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없어졌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라.

 

물론 나는 조만간 죽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직접적으로 맞닥뜨릴 그날까지 내게 죽음은 다만 추상적 개념으로 존재할 뿐이다. 주변 사람이나 내가 심한 병에 걸렸거나 사고를 당했을 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비로소 나도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실감이 들고 그제야 죽음은 내 삶 안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대체로 두려움 때문에 죽음을 외면한다. 하지만 그에 움츠려들지 말고 내 몸이 무상하며 한시라도 해체될 수 있다는 사실을 직면한다면 이 몸과 마음의 형상이 나라는 생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다. 모든 존재의 형상이 무상한 것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이전에는 몰랐던 평화로움이 찾아온다. 죽음을 직면함으로써 나의 의식은 형상과의 동일화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워진다. 불교에서 스님들이 정기적으로 무덤을 찾아 시신들 속에서 좌선을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서구에서는 죽음을 부정하는 분위기가 여전히 농후하다. 심지어 노인들도 죽음에 대해 말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 시체는 눈에 안 띄게 감춘다. 죽음을 부정하는 문화는 결국 깊이 없고 피상적으로 되어버린다. 사물의 외형만을 중시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부정될 때 삶은 그 깊이를 잃어버린다. 이름이나 형상을 떠나 내가 진정 누구인지 알 수 있는 가능성, 명색을 초월하는 차원이 삶에서 사라져 버린다. 죽음이 바로 그 차원으로 통하는 문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끝이 오면 불편해한다. 모든 것의 끝은 조금이나마 죽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언어권에서 헤어질 때 '잘 가'라는 인사 대신 '또 만나자'라고 말한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휴가가 끝날 때, 애들이 성장해서 집을 떠날 때, 어떤 체험의 끝에 왔을 때 나는 약간의 죽음을 체험한다. 내 의식에 나타났던 하나의 '형상'이 해체되는 것이다. 그리고 공허한 마음이 남는다. 사람들은 그 공허함을 느끼지 않으려고, 직면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삶에서 끝을 받아들이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끝을 환영하는 법을 배운다면 처음에는 불편하게만 느껴지던 공허함이 어느 순간 깊고 평화로운 내면의 여유로움으로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

 

매일 매일 이렇게 죽는 법을 배움으로써 삶에 나를 좀 더 열 수 있다.

 

 

-에크하르트 톨레-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의 정체성과 자아를 무척이나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잃고 싶지 않아 한다. 죽음의 공포가 그토록 심한 것도 그런 마음에 기인한 것이다.

 

'나'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두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름과 형상이 그 귀중한 '나'라는 착각, '나의 이야기''나'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다. 그러한 '나'는 다만 의식의 장애 생긴 일시적 형상에 불과할 뿐인데 말이다.

 

그렇게 '형상=나'라는 생각만을 하면 진정 귀중한 것은 나의 실체이며 내 안 깊숙이 존재하는 생명이며 순수의식임을 알 수 없게 된다. 그것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원이며, 그것만이 내가 잃어버릴 수 없는 유일한 것임을 말이다.

 

삶을 살다 보면 늘 상실을 겪는다. 재산이나 집, 가까운 사람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명예나 직업, 몸의 기능을 잃어버리기도 한다. 그렇게 깊은 상실을 경험할 때마다 내 안에 있던 무언가가 죽어버린다. 내가 누구라고 알고 있는 자아상이 점점 작아지고 초라해진다. 방향감각을 상실하기도 한다. '나는 무언가를 잃어버렸는데... 그것을 잃은 나는 그럼 누구지?'

 

무의식중에 나의 일부라고 동일화했던 형상이 나를 떠나거나 해체되면 극히 고통스럽다. 이를테면 내 존재의 그물망에 휑하니 구멍이 뚫린 기분이다. 내 가슴에도 구멍은 남아 있다.

 

그렇지만 고통과 슬픔을 부정하지도 무시하지도 말라. 고통이 거기 있음을 수용하라. 생각은 상실의 주변에서 서성 거리며 나를 피해자로 만들어간다. 두려움, 분노, 원한, 자기 연민 등이 내가 맡은 피해자 역할에 수반되는 감정이다. 그러한 감정 저변에 무엇이 있는지, 마음이 지어낸 이야기 뒤에 무엇이 있는지 잘 살펴보라. 내 안의 구멍에 휘몰아치는 공허함을 느껴보라. 그 낯선 공허함을 똑바로 마주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 수용이 일어나는 순간 더 이상 두려움은 없다. 놀랍게도 그곳에서는 평화로움이 번져 나올 것이다.

 

죽음이 일어날 때, 생명을 담은 형상이 해체될 때 그 사건이 내 가슴에 남기고 간 구멍에는 형상을 여읜 그것, 아직 발현되기 이전의 그것이 빛나고 있다. 그것을 사람들은 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래서 삶에서 가장 성스러운 것이 죽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수용과 명상을 통해서 신의 평화로움이 나에게 올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인간의 체험이란 얼마나 짧고 덧없는 것인가. 인간의 삶은 얼마나 잠깐인가. 이 세상에 탄생과 죽음을 벗어난 것. 영원한 것이 있는가?

다음을 생각해보라. 이 세상에 만약 한 가지 색. 예를 들어 파랑만 있다 하자. 전세계가 파랑이고 그 안의 모든 것이 다 파랑이라면 그때 파랑은 존재하지 않는다. 파랑을 파랑으로 인식하려면 파랑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다면 파랑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요. 따라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무상함을 인식할 수 있으려면 무상하지 않은 것, 잠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무언가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말해서 나를 비롯해 모든 것이 다 무상하다면 나는 무상을 알 수나 있겠는가? 나를 포함한 모든 형상이 짧은 생명을 가지고 있음을 내가 알고 보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내 안에 해체되지 않을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 아닌가?

 

20세에는 내 몸이 튼튼하고 활력 있음을 안다. 60세에는 내 몸이 약해지고 늙었음을 안다. 나의 생각 역시 20대때와는 달라졌을 수 있다. 하지만 내 몸이 젊거나 늙었다고 아는 마음, 내 생각이 변했다고 아는 맑은 마음에는 변한 것이 없다. 그 맑은 마음이 바로 내 안에 있는 영원이다. 순수의식이다. 형상을 벗어난 '한 생명'이다. 나는 그것을 잃을 수 있는가? 아니다. 내가 바로 그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기 직전에 깊은 평화에 잠겨 몸에서 빛이 난다. 마치 해체되는 형상에서 무언가 빛이 발현되는 듯이 말이다. 때로 매우 늙은 사람들, 중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생의 마지막 몇 주, 몇 달, 심지어 몇 년 동안 거의 투명해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의 눈에서는 광채가 나고 마음에는 더 이상 고통이 없다. 순응을 통해 모든 것을 다 놓아버렸기 때문에 생각이 만들어낸 에고적 '나'가 이미 해체되어버렸다. 그들은 '죽기 전에 이미 죽은'사람들이다. 죽음을 벗어난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들만이 갖는 깊은 평화를 찾는 사람들이다.

 

모든 사고와 재난에는 늘 구원의 가능성이 들어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흘려보낼 뿐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느끼는 극도의 충격은 의식으로 하여금 형상과 나를 동일시했던 과거의 습관을 한 순간에 놓아버리게 하기도 한다. 육체가 죽기 직전 마지막 짧은 순간에 그리고 죽음의 순간에 나는 나를 형상을 벗어난 자유 의식으로 체험하는 것이다. 그때 돌연히 두려움이 사라지고 한없는 평화로움이 찾아든다. '모든 것이 다 좋다'는 것을 깨닫는다. 죽음은 단지 형상의 해체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죽음은 결국 착각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다. 나의 몸이 나라고 생각했던 착각.

 

죽음은 현대 문화가 믿도록 강요하는 것처럼 그렇게 이례적인 일도, 가장 끔찍한 일도 아니다. 죽음은 세상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며 그 반대인 탄생에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 옆에 있을 때 이를 잊지 말라.

 

한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여 임종을 지키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벗으로서 그 자리에 있는 것은 지극히 성스러운 행위이며 대단한 특권이다.

 

죽어가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다가오는 어떤 체험도 부정하지 말라.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부정하지 말고 느끼고 있는 감정도 부정하지 말라. 내가 사자를 위해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무력감이 들고 화가 나고 슬플 것이다. 그 느낌을 받아들여라.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라.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음을 받아들여라. 완전히 받아들여라. 나에겐 통제권이 없음을 받아들여라. 체험의 매 순간에 깊이 순응하라. 죽어가는 이가 체험하는 고통과 불편함 뿐 아니라 거기 수반되는 나의 감정에도 순응하라. 그렇게 순응한 의식 상태, 그리고 그와 함께 오는 고요함이 사자에게 큰 도움이 되고 죽음으로서의 전이를 용이하게 해 준다. 말이 필요하다면 내 안에 있는 고요함에서 나올 것이다. 하지만 말은 다만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다.

 

고요함과 함께 축복이 온다. 평화로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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