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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마음공부

고요함의 지혜: 에크하르트 톨레 8. 관계

by 홍나와 떼굴이 2022. 9.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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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인간에 대해 우리는 너무나 성급하게 판단하고 결론을 내려버린다. 한 인간을 피상적으로 분류하고 그에게 개념적 정체성을 부여하고 독선적인 비판을 하면서 에고는 매우 만족스러워한다.

 

인간은 특정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길들여져 왔다. 유전적 특성은 말할 것도 없고, 어린 시절의 체험 및 자라온 문화적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그들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 그런 것처럼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누군가가 어떤 사람이라는 판단을 내릴 때 우리는 그의 길들여진 마음의 양상을 본연의 모습과 혼동한다. 그런 판단 행위 자체도 습관적이고 무의식적인 마음의 양상이다. 내가 그에게 개념적 정체성을 주는 순간 그것은 그와 나를 동시에 가두어버린다.

 

여기서 인간을 판단하지 말라는 말은 그가 하는 행동에 눈을 감으란 뜻이 아니다. 다만 그의 행동을 길들여진 양상으로 인식하고 수용하라는 뜻이다. 그의 정체성을 그것에만 근거해서 수립하지는 말라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당신뿐 아니라 그 사람도 습관, 형식, 생각이 바로 그 사람이라고 동일하게 여기는 것에서 해방된다. 이제 에고는 더 이상 당신의 인간관계를 지배하지 않는다.

 

에고가 삶을 지배하는 동안 나의 생각, 감정, 행동은 거의 모두 두려움과 욕망에서 나온다. 그러면 인간관계에서도 상대에게서 무언가를 원하거나 상대의 무언가를 두려워하게 된다.

 

내가 그에게 원하는 것은 인정, 칭찬, 관심, 즐거움과 물질이다. 또는 비교를 통해 내가 더 많이 가졌다. 내가 더 많이 안다는 우위를 점유하여 내가 돋보이는 것이다. 반면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사람 때문에 내가 초라해지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전념의 대상으로 삼을 때 에고를 넘어설 수 있다. 남을 깎아내림으로써 나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 사람들을 이용하려는 무의식적인 충동도 넘어설 수 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온 마음을 다 줄 때, 그와 나의 인간관계에서 과거와 미래가 다 사라지고 다만 실제적인 것에만 집중할 수 있다. 누구를 만나든 그와 온전히 함께 할 수 있을 때 그에 대한 개념적 정체성을 넘어서서 두려움이나 욕망에 휘둘리는 일없이 그와 대화할 수 있다. 개념적 정체성이란 그가 누구이고 과거에는 무엇을 했다는 내 나름의 주관적 판단을 말한다. 중요한 것은 전념, 즉 깨어 있는 고요함이다.

 

인간관계에서 두려움과 욕망을 넘어서는 것은 얼마나 멋진 일인가. 사람은 그 무엇도 원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그녀의 과거가 나의 과거이고, 그녀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며, 그녀의 의식 수준이 나의 의식 수준이라면 나도 꼭 그녀처럼 생각하고 행동했을 것이다. 그것을 깨달을 때 용서와 자비 그리고 평화로움이 온다.

 

하지만 에고는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 더 이상 대립하지 않고 독선도 부릴 수 없다면 에고는 힘을 잃어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여유로움 안으로 누가 들어오든 다 귀한 손님으로 맞이할 때, 그가 자신의 모습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둘 때 그는 변하기 시작한다.

 

한 사람을 진정 제대로 알려면 그에 '대한' 어떤 것도 알 필요가 없다. 그의 과거와 역사, 그의 이야기를 알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무엇에 대한 앎'과 '개념을 떠난 깊은 앎'을 혼동한다. 이 두 가지 양식의 앎은 서로 차원이 다르다. 전자는 형상에 속해 있고, 후자는 형상을 떠나 있다. 전자는 생각을 통해서 작용하고, 후자는 고요함을 통해서 작용한다.

 

'무엇에 대한 앎'은 실용적인 목적에 유용하다. 실용적 수준의 일에서는 그것이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하지만 인간관계에서 '무엇에 대한 앎'이 주도권을 잡을 때 삶은 격하되며 심지어 파괴되기까지 한다. 사고와 개념은 인위적인 장벽을 만들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대화와 교류는 존재가 아니라 생각에 뿌리를 두게 된다. 생각의 장벽이 없을 때 사랑은 자연스럽게 모든 인간관계에 스며든다.

 

인간의 대화와 교류는 대체로 말을 주고 받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 즉 사고의 영역에.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약간의 고요함이 필요하다. 특히 가까운 관계에는 더욱 필요하다.

 

고요함이 가져오는 드넓은 공간의 여유로움 없이는 어떤 인간관계도 자라날 수 없다. 그와 함께 자연 속에서 명상하라. 고요한 시간을 함께 하라. 그와  자연 속으로 산책을 가고 함께 차 안에 앉아 있으라. 집에 있을 때에도 고요함 속에 함께 있는 것이 익숙하고 편안해야 한다. 고요함은 만들어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또 그럴 필요도 없다. 고요함은 이미 여기 존재한다. 다만 소란한 마음이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그저 마음을 열고 고요함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드넓은 고요함이 없다면 인간관계는 생각의 지배를 받아 문제와 갈등에 사로잡히기 쉽다. 하지만 고요함이 있다면 무엇이든 다 끌어안을 수 있다.

 

인간관계에 고요함을 가져가는 또 다른 방법으로 깊이 듣기가 있다. 누군가의 말에 진정 귀 기울일 때 고요함의 차원이 내면에서 솟아올라 관계의 중심에 자리한다. 하지만 깊이 듣기의 기술을 제대로 습득한 사람은 거의 없다. 대체로 사람들의 마음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그들은 당신이 한 말을 마음속으로 비판하거나 당신의 말이 끝난 다음 대꾸할 말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심지어는 당신의 말을 전혀 듣지도 않고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있을 수도 있다.

 

깊이 듣기는 소리를 듣는 지각 작용을 훨씬 넘어선 곳에 있다. 깨어 있는 고요함이 내면에서 솟아올라 현존의 공간이 생성되고 그 안에서 상대의 말을 수용하는 것이다. 그 안에서 말은 이차적인 것이 된다. 말 자체는 의미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말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듣는 행위이며 또한 듣는 사람 안에서 솟아오르는 순수의식의 공간이다. 그곳은 의식이 통일되는 장소이다. 생각이 만들어낸 분리의 장벽 없이 상대를 만나는 곳이다. 이제 상대는 더 이상 '남'이 아니다. 그 공간 안에서 당신과 상대는 하나가 된다. 하나의 맑은 마음, 하나의 순수의식이 된다.

 

당신은 가까운 관계에서 똑같은 일이 자주 되풀이되는 것을 느끼는가? 사소한 의견의 불일치가 종래에는 격한 싸움으로 번져 감정적 고통을 겪는가?

 

이런 일의 근저에는 에고의 기본적 습관이 깔려있다. 바로 나는 당연히 '옳고' 너는 당연히 '틀린'것이다. 또한 특정의 사물이나 사람과 주기적으로 대립하는 상황을 만들려는 에고의 습관도 한몫한다. '나' '남'을 분리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에고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너나없이 모든 인간의 내면에 누적되어온 감정의 고통이 있다. 이는 개인의 과거에서도 오지만 아주 오랜 옛날부터 인류가 겪어온 집단적 고통의 체험에서도 온다. 내면의 에너지장인 이 '고통의 몸'은 때로 우리를 완전히 장악한다. 고통의 몸이 살아가려면 더 많은 감정적 고통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고통의 몸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여 극히 부정적인 것으로 만든다. 부정적 생각과 주파수가 딱 맞는 고통의 몸은 가까운 사람들을 자극하여 부정적 감정이 나오도록 부추긴다. 특히 파트너를 건드려놓고는 눈앞에 전개되는 고통의 해프닝을 즐긴다.

삶을 너무나 힘들게 만드는 고통의 몸. 내 몸 깊은 곳에 자리한 고통과의 무의식적인 일체화에서 탈피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알아차리면 된다. 과거의 고통이 내가 아님을 알며 그저 과거의 고통이라고 알아차리면 된다. 고통이 나와 파트너의 내면에서 일어날 때 잘 지켜보라. 무의식적인 일체화를 깨어버리면. 그래서 내 안에서 고통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게 되면 고통으로 공급되던 에너지가 차단된다. 그러면 고통의 몸은 조만간 힘을 잃게 된다.

 

때로 인간관계는 지옥이다. 때로 인간관계는 커다란 정신 수행이다.

 

다른 사람을 보고 큰 사랑을 느낄 때, 자연의 아름다움을 관조할 때 내면의 무언가가 깊이 감응한다. 잠시 눈을 감고 그 사랑의 실체를 느껴보라. 나의 본연의 모습, 나의 실체와 분리될 수 없는 내면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느껴보라. 나의 겉모습은 내면의 나, 실체의 나를 일시적으로 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겉모습은 나를 떠나겠지만 사랑과 아름다움은 결코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사물의 세계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나? 나를 둘러싸고 있는 셀 수 없이 많은 물건들. 내가 매일 다루는 물건들과 말이다. 내가 앉는 의자, 글을 쓰는 펜, 차와 집들은 내게 단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인가? 나는 가끔씩 아주 잠시라도 그것들에 주목하고 온전히 전념함으로써 그것들의 존재와 삶을 인정해주는가?

 

사물에 집착하고, 나와 남의 눈에 나의 가치가 올라가 보이도록 하기 위해 사물을 이용하고 있다면 사물에 대한 관심이 내 삶을 지배하게 된다. 사물과 나를 동일시할 때 나는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사물 안에서 나를 찾기 때문이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때, 기존 관념의 투영없이 그 존재를 인정할 때 당신은 사물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그것이 정말 생명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만 당신의 감각에 그렇게 느껴질 뿐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물리학자들은 분자적 차원으로 내려가면 사물의 실체가 진동하는 에너지장임을 이미 증명했다.

 

사물의 영역을 봄에 있어 '나'가 개입하지 않을 때 주변 세상은 생각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되살아 난다.

 

누군가를 만났을 때 비록 순간에 불과하더라도 당신은 그 사람에게 온전히 집중함으로써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을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하나의 기능이나 역할로 격하시키는가?

슈퍼마켓 계산원과 당신의 관계는 어떠한가? 주차관리원은? 수선공은? 고객은?

 

잠시만 전념하면 충분하다. 그 사람을 바라보거나 그의 말을 들을 때 2.3초 정도 생생한 고요함이 자리하면 된다. 우리가 평소 행하고 동일화하는 역할 이상의 실체적인 것이 나타나려면 그 정도면 충분하다. 모든 역할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습관화된 의식의 일부이다. 온전한 전념을 줄 때 나타나는 것은 습관화되기 이전의 것이다. 나의 이름과 형상 밑에 있는 나의 실체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대본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다. 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이 된다. 그 차원이 나의 내면에서 솟아오를 때 남의 내면에서도 같은 차원을 이끌어낸다.

 

물론 궁극적으로는 남이란 없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을 만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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