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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마음공부

고요함의 지혜: 에크하르트 톨레 7. 자연

by 홍나와 떼굴이 2022.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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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단지 육체적 생존만을 자연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고향집으로 가는 길.생각이 만든 감옥을 빠져나오는 길을 찾는데도 자연에 의존한다. 인간은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행하느라 정신이 없다. 인간은 과거의 추억에 잠겨 있지 않으면 미래에의 기대에 가득 차 있다. 그런 와중에 문제로 점철된 삶의 미로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바위도 식물도 동물도 알고 있는 일을 우리 인간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인간은 존재하는 방법, 마음을 고요히 하는 방법, 자기 자신이 되는 방법, 삶이 있는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방법을 잊어버렸다.

 

자연에 전념할 때, 즉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은 채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 것에 온 마음을 둘 때 나는 생각의 감옥에서 한 발짝 걸어 나와 생명과 연결될 수 있다. 그 안에는 모든 자연스러운 것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돌 하나, 나무 한 그루, 개 한 마리에 온 마음을 둔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돌 하나를 지각하고 나의 맑은 마음속에 온전히 두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돌의 실체 중 무언가가 나에게 다가온다. 그 돌이 너무나 고요함을 느끼면서 나도 모르는 새 동일한 고요함이 내 안에서 솟아오른다. 그 돌이 얼마나 존재 안에서 깊이 쉬고 있는지. 얼마나 온전히 돌 자신의 본래 모습과 하나가 되고, 지금 그것이 거하는 장소와 하나가 되어 있는지 느낀다. 그와 함께 나도 내 안으로 깊이 들어가 안식의 장소에 이른다.

 

자연의 품에서 걷고 쉴 때에는 거기에 온몸과 온 마음을 두어야 자연에 경의를 표할 수 있다. 마음을 고요히 하고 바라보라. 귀 기울여 들어보라. 자연에 존재하는 풀 한포기. 뛰어노는 동물 한 마리가 다 온전히 제 자신으로 존재함을 보라. 인간과는 달리 그들은 제 자신을 둘로 분열시킬 줄 모른다. 그들은 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 줄도 모르고 그 이미지를 통해서 삶을 살아가는 법도 모른다. 그러니 이미지를 더 멋지게 꾸미거나 보호하려고 애쓰지도 걱정하지도 않는다. 사슴은 그저 사슴일 뿐이다. 수선화도 그저 수선화일 뿐이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제 자신과 하나일 뿐만 아니라 완전한 전 우주와도 하나가 되어 있다. 그들은 우주를 '나' '나머지 존재들'로 갈라놓지 않았기에 제 자신을 분리된 존재로 주장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물망처럼 연결된 전체 생명의 일부로 존재한다.

 

자연을 명상하면 자유로워진다.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나'로부터 해방된다.

 

자연의 섬세한 소리에 맑은 마음을 가져가보라. 바람에 나뭇잎이 서걱이는 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풀벌레 우는 소리, 새벽녘 새의 첫울음소리에 귀 기울여보라. 소리를 듣는 일에 전념하라. 귀에 들리는 그 소리 너머에 무언가 위대한 것이 있다. 생각으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성스러움이 거기 있다.

 

나의 몸을 창조한 것은 내가 아니다. 내 몸의 기능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아니다. 인간의 마음보다 월씬 더 큰 지혜가 거기 작용하고 있다. 바로 자연을 살리고 지속시켜주는 지혜이다. 그 지혜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내 안의 에너지 장을 느끼는 것이다. 몸 안으로 들어가 팔딱이는 그 무엇의 존재와 생명의 느낌을 맛보아라.

 

강아지와 그 주인을 잘 살펴보라. 장난에 몰두한 강아지의 기쁨. 언제라도 삶을 마음껏 누리고 축하하려는 강아지의 조건 없는 사랑을 보라. 그리과 이와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주인의 마음을 보라. 삶의 시련이라는 짐을 짊어지고 생각에 잠긴 그는 의기소침하고 불안하다. 그의 삶에 주어진 오직 하나뿐인 집인 여기에 그는 없다. 그의 삶에 주어진 오직 하나뿐인 시간인 지금에도 그는 없다. 당신은 궁금해지지 않는가? 이런 사람과 살면서도 강아지는 어떻게 기쁨과 온 정신을 잃지 않는지 말이다.

 

자연을 오직 머리로만 인식하려 할 때 그 생동감과 생명을 느낄 수 없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직 외형뿐. 그 겉모습 속에 담긴 생명, 성스러운 신비함은 알 수 없다. 생각은 자연을 지식추구나 이윤 추구와 같이 실용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상품으로 격하시킨다. 고대의 숲은 목재가 되고, 새는 연구 대상이 되며, 산은 광산 채굴권이나 정복의 대상이 되어 버린다.

 

자연을 볼 때, 우선 마음속에 아무런 생각도 없는 공간을 만들어라. 이렇게 다가갈 때 자연도 당신에게 다가와 인간 의식을 진화시키고, 나아가 지구 의식의 진화에도 참여할 수 있다.

 

꽃 한 송이가 지금 여기에 온전히 존재하는 모습. 삶에 완전히 순응한 모습을 보라.

 

집에서 기르는 꽃이나 나무를 진정 바라본 일이 있는가? 우리가 편의상 식물이라고 부르는 그 꽃이. 익숙하면서도 한편으로 신비로운 존재인 그 꽃이 자신의 비밀을 가르쳐줄 수 있도록 허용한 적이 있는가? 그 꽃이 얼마나 깊이 평화로운지 보았는가? 꽃 한 송이가 발하는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느끼는 순간 그 꽃은 당신의 스승이 된다.

 

동물 한 마리,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가 삶 속에서 쉬는 모습을 보라. 그것이 본연의 모습으로 존재함을 보라. 가늠할 수 없는 당당함과 순수함과 성스러움이 거기 있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려면 우선 사물에 이름표를 붙이고 분류하는 마음의 습관을 넘어서야 한다. 그때,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차원, 감각으로는 지각할 수 없고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차원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조화로움이다. 그것은 전체의 자연뿐 아니라 내 안에도 고루 스며 있는 성스러움이다.

 

 

 

내가 숨쉬고 있는 공기는 자연이다. 숨쉬는 과정 그 자체도 자연이다.

 

나의 호흡을 잘 살펴보면 호흡을 통제하는 것이 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의 숨결이다. 만약 숨쉬는 법을 기억해야만 한다면 나는 곧 죽고 말 것이다. 만약 호흡을 멈추려고 시도한다면 곧 자연이 주도권을 잡을 것이다.

 

나의 호흡을 바라보고 온 마음을 거기 두는 법을 배울때 나는 가장 내밀하고 강렬하게 자연과 다시 하나가 된다. 그로부터 나는 치유되고 저 깊은 곳에서 힘이 솟아난다. 거기서 의식의 전환이 일어난다. 생각과 개념으로 이루어진 외부적 의식 세계가 이제 걸림 없는 순수의식인 내면의 의식 세계로 변화한다. 

 

자연은 내가 생명과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나를 이끌어주는 스승이다. 하지만 나에게 자연이 필요하듯이 자연에게도 내가 필요하다.

 

나는 자연에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나는 우주 전체에 무수히 많은 형태로 모습을 나타내는 '한 생명'의 일부이다. 그 무수한 형태는 모두 서로 온전히 연결되어 있다.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가 성스러움, 아름다움, 깊은 고요함과 당당함 속에 거하는 것을 내가 바라볼 때 나는 그 꽃과 나무에게 무언가를 보태는 것이다. 나의 인식과 맑은 마음을 통해서 자연 역시 제 자신을 알게 된다. 자연은 바로 나를 통해서 자신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알게 되는 것이다.

 

드넓은 고요한 공간이 자연의 모든 것을 감싸안고 있다. 나 역시 그 공간에 감싸여 있다.

 

내면이 고요할 때만 나는 바위, 풀, 동물이 머무르는 고요함의 영역에 다가갈 수 있다. 마음의 소란함이 잦아들때만 깊은 차원에서 자연과 하나 되어, 지나친 사고 작용이 만들어낸 분리된 존재라는 느낌을 넘을 수 있다.

 

생각은 생명 진화의 한 단계이다. 자연은 생각이 생겨나기 이전에 존재하는 순진무구한 고요함 속에 머무른다.나무, 꽃, 새, 바위는 스스로의 아름다움과 성스러움을 알지 못한다. 인간은 고요해지면 생각 저편으로 넘어간다. 생각 저편의 고요함 안에는 앎과 맑은 마음의 차원이 존재한다.

 

자연은 나를 고요함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그것은 자연이 내게 주는 선물이다. 내가 고요함의 장 안에서 자연을 지각하고 자연과 함께 할 때 그 안에 나의 맑은 마음이 두루 퍼진다. 그것이 내가 자연에게 주는 선물이다.

 

나를 통해 자연은 자신을 알게 된다. 자연은 수백만 년동안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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