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조루란 이름은 도연명陶淵明의 시詩
귀거래혜사歸去來 [兮]辭라는 칠언율시에서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영조 때 유이주(柳爾胄)가
낙안군수로 있을 때 건축했다.
큰 사랑채 대청 위의 상량문에 따르면
영조 52년(1776)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조선 후기 귀족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는
남이 있는 몇 안 되는 건축물이다.
-자형 행랑채, ㅜ자형 사랑채, ㄷ자형
안채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고
사당과 연당이 남아 있다.
집은 지은 12년 후에 유이주가 작성한
<장자 구처기>에 따르면 최초 운조루는 78 칸집이었다.
화재와 세월로 인한 유실, 필요에 의한 복구와
증축 등의 과정이 있었다. 2007년 문화재청의
실측 조사에 의하면 현재 63칸이 보존되어 있다.
운조루의 구조양식은 기둥과 기둥 위에 건너 얹어
그 위에 서까래를 놓는 나무인 '도리'와 그 도리를 받치고 있는
모진 나무인 '장여'로만 된 '납도리집'구조이다.
지붕은 사랑채, 안채가 이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운조루'는 일종의 택호에 해당하는데,
원래는 큰 사랑채 이름이다.
'구름 속에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란 뜻이다.
운조루와 오미동은 이른바 길지(吉地)로 유명한데
길 지란 지덕이 있는 좋은 집터란 뜻이다.
하지만 세상사 요행은 없는 것이고 누구나
그러하듯이 성실하게 노동하고 그 대가로
살아가는 사람 사는 이치는 동일하다.
사람 살기에 안온한 땅이란 뜻으로
이해하면 족할 것이다.
<출처: 운조루 홈페이지>
주말 서울행 포기하고 지리산행
광양 매실마을 들렀다가
두 번째 코스로 다녀온 구례 운조루 소개해본다.
5년 전 엄마 모시고 왔었는데 그 엄마는
지금 94세가 되셨고 아직도 정정하시다.
5년전 방문 때 황율을 까먹으며 엄마랑 대화를
나누시던 운조루의 쥔장 할머니도
아직도 정정하시더라 비슷한 연배이실 텐데 말이다.
풍수명당이라 그런가??
운조루에 전해오는 〈오미동 가도〉와
현재 이 집의 공간 구조를 살펴보자.
먼저 운조루는 대략 1,000평이나 되는
비교적 넓은 대지에, 방형에 가까운
돌담장을 이루고 있다.
남쪽에 연지를 두고,
동쪽에서 서쪽으로 대문 앞을
흐르는 시냇물로 일차적으로
외부 공간과의 구역을 정리한 뒤에
대문간과 행랑채가 자리 잡고 있다.
중심부에는 안채를 두고,
남향의 건물군이 동서축으로
길게 배치된 장방형이다.
큰 사랑은 서쪽 방향으로,
작은사랑은 남쪽 방향으로
중심 차인 안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는 장독대가 있는
안마당을 중심으로 건물들이
각기 동서남북을 향하여 배치됨으로써
‘ㅁ’ 자 형태를 이루고 있다.
아래채와 중문 행랑채가
남향으로 길게 돌출되어 행랑채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소실되었다.
행랑채는 바깥사랑마당과 안 사랑마당을
가운데 두고 병렬로 마주 보면서
동서방향으로 길게 배치되어 있다.
이제부터 각 부분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대문은 1776년에 세워졌지만
얼마 되지 않은 1804년에
한 번 중수되었다.
창건주 유이주 사후 홍살문이
내려져서 중수된 것이다.
현재 대문은 맞배의 솟을대문이지만
최초 모습은 '전라 구례 오미동 가도'
에서 보면 합각지붕이다.
중수하면서 현재와 같은
솟을대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옛날에는 대문에 '호랑이 머리뼈'를
걸어 두었지만 도난을 맞은 이후
'말머리뼈'로 대신하고 있다.
대문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깥마당이 나오고
마당 뒤의 사랑채와 바로 마주하게 된다.
좌측에 놓인 것이 큰 사랑채이고
우측에 놓인 것이 중간 사랑채(귀래정)이다.
평면구성을 살펴보면 큰 사랑채는
남측채 6칸(중문 간 포함)과
북측채 2칸으로 구성되어
전체적으로 'ㅗ'자형이고
남측채의 동쪽으로 안채의
중문 간이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외주 문이라 했으며 사랑방은
2칸으로 수분 실장 방이라 했다.
수분은 창건주 유이주의 아들
유덕호의 호이다.
사랑방 서쪽에는 대청 2칸이 있는데
이것이 운조루이다.
운조루는 이 집의 택호이기도 하다.
운조루는 도연명의 귀거래사라는
칠언율시의 머리글자만 따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雲無心以出岫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鳥倦飛而知還 새들은 날기에 지쳐 우리로 돌아오네
서쪽의 누마루는 족 한정이라 부른다.
한가롭게 머문다는 의미로
유이주의 대손인 유억의 호이다.
사랑채 대청마루에서 북쪽으로 빠져
올라간 이랑을 이 긍재라고 불렀다.
유덕 양의 일기 <시언>에서는
이를 서실 책방이라고 하였다.
이곳에서 공부하여 여러 사람이
관직으로 나갔다고 전한다.
큰 사랑채
대문을 중심으로 양쪽의
동 행랑과 서 행랑으로 불렀다.
'전라 구례 오미동 가도'에서 보면
양쪽 행랑에서 북쪽으로 솟아 올라간
익랑은 각각 동족 참사와 서협랑이라고
불렀지만 지금은 없다.
행랑채는 대문을 중심으로
남쪽 담장 대신 18칸이
일직선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헛간과 창고 등으로
쓰이고 있지만 옛날에는
노복들이 살았다.
솟을대문 동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 안주인이
출입했다고 한다.
건축 당시 이 행낭은
대문을 중심으로
각각 12칸이었으난
지금은 동쪽이 11칸,
서쪽이 7칸만 남았다.
행랑채
솟을대문 동쪽으로
작은 문이 있어 안주인이
출입했다고 한다.
건축 당시 이 행낭은
대문을 중심으로
각각 12칸이었으난
지금은 동쪽이 11칸,
서쪽이 7칸만 남았다.
지리산 남쪽 끝자락인 구례 오미리에는 금환 락지(金環落地, 금가락지가 떨어진 명당)에 자리 잡은 대표적인 우리의 전통 누정인 운조루(雲鳥樓)가 있다. 운조루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이라는 뜻으로, 오미동 유 씨 집안 사랑채 누마루의 당호다. 운조루는 그 앞에 펼쳐진 너른 들판의 영화로운 시절과 슬픈 이야기를 한 몸에 담고 있으며, 호남지방의 대표적인 양반가 옥이다. 이 집은 삼수 공(三水公) 유이주(柳邇冑)가 지었다고 전해지며, 유이주는 낙안군수와 삼수 부사를 지낸 무관이다.
창건 당시의 이 집터에 대해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집터를 길지라고 했으나 바위가 험하고 주변이 척박해서 그 누구도 집터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을 이 집을 지은 유이주가 알아보고 이 땅에 집을 짓게 되었으니 지신은 이것을 고맙게 여기어 수백 명의 장정을 동원하여 터를 닦았다.’고 전하고 있다. 유이주는 본래 대구 사람으로 이 금환 락지의 명당에 매료되어 은퇴하면 이곳에 세거를 이룰 것을 작정하고 그때부터 운조루 건축 사업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짓기 위해 7년이라는 세월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집안의 후손들에 의하면 이 공사를 마무리하고자 유이주가 함흥성 오위장으로 발령이 났을 때에도 축지법을 써서 하룻밤 사이에 천리길을 오가며 작업을 독려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 구례 오미동에는 금환 락지와 더불어 3대 진혈인 금구 몰니(金龜沒泥, 금거북이 진흙에 묻힌 자리)와 오보교취(五寶交聚, 다섯 가지 보물이 쌓인 자리)가 있는데, 유이주가 잡은 터가 금구 몰니 명당이라고 한다. 실제로 집터를 잡으면서 땅을 파보니 금구 몰니의 명당을 입증이라도 하듯 어린아이 머리만 한 돌 거북이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이 돌 거북 출토 위치가 안방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부엌에서 때는 불로 거북이 말라죽는다며 명당의 혈자리에 온돌이나 마루가 아닌 물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부엌을 배치하였다고도 전한다.
오보교취는 금, 은, 진주, 산호, 호박 등 다섯 가지 보물이 쌓여 있기 때문에 이곳에 집을 짓고 살면 하늘의 도움으로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명당이다. 이 세 명당은 오미동 구만리 들녘에서 상대 중대 하대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 사람들은 서로 자기네 집터가 그 자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운조루 진입로는 다른 전통 마을들의 진입로와 마찬가지로 산허리를 돌며 가는 곡선으로, 집이 보이다 안 보이 다를 반복하여 찾는 이를 더욱 설레게 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안채는 큰 사랑채와
중간 사랑채 사이에 있는
중문 간을 통하여 진입할 수 있다.
여성들과 아이들이 기거했던 공간이다.
지금도 살림채로 사용 중이다.
안마당보다 높게 기단을 쌓은 'ㄷ'자형 평면이
안채의 기본형이나 형태상 귀래정의 오른쪽으로
붙은 남 행랑이 안채 전면에 있어
'튼ㅁ'자형을 이룬다고도 할 수 있다.
안채는 방향으로 보자면 북측채에 해당한다.
좌우측에 안마당과 같은 높이로 방과 부엌,
광이 있는 서측채와 동측채를 두었다.
남측으로 단을 두고 높이를 낮추어
곡간채(남측채)가 자리하고 있다.
서측채에 있는 부엌에 들어서면 남측으로
큰 사랑 뒷마당을 통하여 큰사랑에 계신
손님의 수발을 들고 음식을 나를 수 있는
문이 있으며, 북측에는 큰사랑뒷마당
담장 뒤로 부엌일을 할 수 있도록
우물이 있는 부엌 마당을 두었다.
안채 뒤로는 단을 높여 안채 뒷마당이 있는데
지금은 텃밭으로 사용하고 있다
특이한 구성은 다락 구조인데, 안방 위에는
골방이 있고 그 위로는 다락을 두었다.
좌측채와 우측채 모두 상부에 다락이 있다.
이렇게 다락을 두어 층을 구성하는 수법은
경북의 예천 권 씨 종가나 의성 김 씨 종가에서처럼
주로 경상북도 가옥에서 볼 수 있는
가옥구조이다. 서측채 다락은
사랑 뒷마당으로 오를 수 있는데
남단 벽에는 원래 가로로 누워진
띠살 들창문이 달려 있어
옛 시절에 남성들에 의해 통제된
젊은 여성들이 사랑마당을 오가는
남성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기도 했다.
안채
대문을 통해 들어서면 바깥마당이 나오고
마당 뒤의 사랑채와 바로 마주하게 된다.
좌측에 놓인 것이 큰 사랑채이고
우측에 놓인 것이 중간 사랑채이다.
통상 귀래정이라 불렀고
마당으로 가장 돌출되어 있다.
중간 사랑은 이 집주인의 아들이 기거했던 곳이며
그 아래로 손주 등이 사는 작은사랑이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지고 남아있는 초석에서
그 흔적만 느낄 수 있다.
중간 사랑채
운조루에는 두 가지
큰 자랑거리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타인 능해(他人能解)’라는
글이 새겨진 큰 쌀독이다.
'누구든 이 쌀독을 열 수 있다'는 뜻이며,
흉년이 들었을 때 굶주린 사람들에게
이 쌀독을 열어 구제했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쌀독에는 두 개의 구멍이 있는데
한 개의 구멍에 꽂혀있는 나무를 돌리면
다른 한 개의 구멍에서
쌀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기 꽂혀 있던
나무는 도둑을 맞았다고 한다.
'타인 능해 쌀독'
운조루의 두 번째 자랑거리이자
이 집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굴뚝이다.
운조루에는 첨탑과 같이 하늘 높이
쌓아 올린
운조루의 굴뚝은
전혀 예상치도 못했던 곳에,
눈에 잘 띄지도 않게 숨어 있다.
밥 짓는 연기가 멀리 퍼지는 것을
막고자 함이며, 끼니를 거르는 사람들이
이 집의 굴뚝 연기를보면서
더욱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라고 한다.
굴뚝이 높아야 연기가 잘 빠진다는 것을
집주인이나 목수가 몰라서 굴뚝을
이처럼 낮게 만든 것이 아닌 것이다.
작은 것에도 배려를 아끼지 않던
우리 조상들의 아량이
운조루 굴뚝에 남아 있다.
운조루의 안채는
현재 사랑채와의 사이에 있는
중문을 통하여 드나들게 되어 있다.
북쪽에 골방이 붙은
안방은 안주인의 거처이며,
대청은 사랑 대청과 마찬가지로
안방과 건넌방 사이에 위치하여
이들 방으로 출입하는 전실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집안의 큰일을
치르는 중심이 된다.
또 주로 자녀들이 거처하는 방과
며느리의 방으로 이용되는 건넌방,
안방의 난방과 주방의 역할을 겸하는
안방 부엌 및 평상시 난방만을
하는 건넌방 부엌, 그리고 음식물 및
김칫독을 보관하는 찬방,
곡식을 보관하는 곳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마당의 장독대
운조루 담장에 만발한 동백꽃과~~
노랗게 핀 산수유를 뒤로하고~~
지리산 둘레길
걷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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