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불우한 10대 시절을 보낸
루이 암스트롱은
우연히 옆집에 사는 유대인으로부터
코넷을 선물 받은 후 코넷 연주자로
재즈에 입문하였다.
열아홉 살이 되던 1918년 9월,
루이 암스트롱은 미시시피강을 오가는
유람선에서 브라스 밴드 연주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멋진 연주 솜씨는
금세 뉴올리언스에 소문이 났고,
그로부터 4년뒤인 1922년 그의 멘토인
킹 올리버를 따라 시카고로 떠나
크리올 재즈밴드에서 명성을 떨쳤다.
1963년에는 한국을 방문해
재즈의 정수를 보여줬고,
이날 이후 우리는 재즈 하면
루이 암스트롱을 떠올리게 되었다.
허스키 목소리로 부르는
스캣(Scat)과 멋진 트럼펫 연주
그리고 익살맞은 표정 등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다.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에 가면
반드시 들려봐야할 곳
잭슨광장 세인트루이스 대성당
프렌치쿼터, 로얄스트리트, 버번스트리트
프렌치 마켓, 굴전문식당들
그리고 루이 암스트롱공원을
목록에서 빼 놓을 수가 없는일
그래서 다녀왔다.
뉴올리언스 태생인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
의 일대기에 대해선 한국에
돌아와서야 공부를 해 보았으니
나도 참 한심하다. 여행떠나기전에
공부하고 갔어야~~쥐!!
가는날이 장날이라고
공원 입구부터 여성 유방암
예방 캠페인과 모금운동을 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어 뉴올리언스 인근
주민들은 거의 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듯
덕분에 개성있게 분장하고 나온
가장행렬을 보는 행운을 가졌으니
복 받은 날 ㅋㅋㅋ
모자보건 캠페인 행사에
나오신분들치고는
정말 열과 성의를
다 하셨네여
형형색색의 깃털로
무엇을 만든거임?
우~~와 색시 색시 여인들
아가씨, 줌마님들 할것없이
저마다 개성을 뽐내고
나오셨네요 ㅎㅎ
같은 단체에서 나오신듯
분장과 복장이 거의
엇비슷한걸 보니 ㅋㅋ
한국에서라면
이런모습 감히
상상하실수나
있을까요?
미국에서나 가능한 일
이분들 역시 색다른 분장
을 하고 나오심
약간 젊은 취향의
분장 포스
덕분에 떼굴님과
나는 눈이 호강
루이 암스트롱님
어디갔나요? ㅋㅋ
“새첼 마우스”를 줄여서
“새취모”라는 닉네임으로
널리 알려진 루이 암스트롱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잘 알려진 트럼펫 연주자
중의 하나였다.
그는 1900년 7월 4일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나 그로부터
71년후 뉴욕시에서 타계했다.
어릴때 그는 법에 저촉되는 일을
저질러 감화학교로 보내졌는데
거기에서 처음으로 트럼펫
연주를 배웠다.
1922년에 그는 시카고로 가서
킹 오리버스 크리올 재주 악단에서
코넷을 연주했다.
그 후 3년 만에 그는
자신의 악단을 결성했고
그 때부터 갑작스런 성공의 길을
걷게 되었다.
새취모(루이 암스트롱 닉네임)는
트럼펫 연주에 있어서
혁신자로서 뿐만 아니라
기교가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리고 그는 누구도 따르지
못하는 기록을 세우게 되는데
높은음을 연속적으로 무려
280회나 소리 냈다.
그는 주로 정격 스윙 스타일의
트럼펫 연주자로 기억되는데
이로 말미암아 노소를 막론한
전 세계인들로부터 숭배를 받았다.
어떤 비평가들은 그를
"재즈의 아인쉬타인"
이라고 일컬었다.
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트럼펫 연주를 통해서
엄청난 생명력과 스타일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친절하고 정력적인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다.
재즈의 시초는 17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프리카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수출된 흑인 노예의 자손들은
아프리카의 민속음악의 전통과
감각을 교회의 찬송가 등
유럽 음악의 영향 속에서
녹여내어 흑인 영가로
발전시켰다.
이런 흐름은 노예해방 후 19세기 말엽,
남부의 흑인 피아니스트들 사이에서
래그타임이라는 율동적인 스타일의
피아노 음악이 이어져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재즈의 중요한
모체 중 하나로 간주된다.
이런 역사에 따라 재즈를
미국의 민속음악으로 보는
시각도 있으나 전 세계로 전파되고
세계 각국 민속음악과 결합되면서
사실 그 경계는 모호해졌다.
그후
스윙(Swing),
비밥(Be bop),
쿨 재즈(Cool Jazz),
퓨전 재즈(Fusion Jazz) 등
시대의 변화에 따라 재즈의 주류가
바뀌며 발전해왔다.
무엇보다 재즈란 곡의 형식보다는
연주 스타일 및 연주 그 자체에
본질이 있으며, 작곡된 곡에 초점이
있는 클래식과는 달리 언제나 연주자의
연주가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져왔다.
그래서 재즈의 본질을
즉흥성(Improvisation)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물론 이런 시각 또한 시대의
변화에 따라 큰 변화를 겪는 중이며,
그렇게 재즈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변화하는 장르가 되고 있다.
루이암스트롱은
미국의 재즈 트럼펫 연주자이자
가수로 재즈초기의 뉴올리언스
스타일을 오늘날까지 전한
재즈의 선구자이다.
'핫 파이브(Hot Five)',
'올스타즈' 등의 악단을
결성하여 활약하였으며
재즈에 독주의 중요성을 확립하고
스캣창법을 최초로 사용하였다.
가난한 흑인의 아들로 태어나
소년시절 소년원에서 코넷을 배우고
1922면 시카고에서 킹 올리버악단에
들어가 주목을 끌었다.
그후 악기를 트럼펫으로 바꾸어
점차 인기가 높아졌으며,
1925~1928년 자신의 악단인
'핫 파이브(Hot Five)' 및
'핫 세븐(Hot Seven)'
의 이름으로 취입한 그의 레코드들은
재즈 역사상 불후의 명연주로
꼽히고 있다.
1931년에는 대악단을 조직,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유럽여행을
하여 큰 성공을 거두고 1947년에는
악단 '올스타즈'를 결성하여 죽기
전까지 활약하였다.
전성기의 그는 음색, 기교, 감정 등
모든 점에서 가장 뛰어났고,
재즈의 여러 면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그가 재즈 연주에 있어
독주의 중요성을 확립한 것과,
또 가수로서 스캣창법을
처음으로 사용한 점 등은
간과할 수 없는 일들이다.
재즈음악의 선구자
루이암스트롱을 기리는
공원에는 드넓고 시원한
호수도 잘 조성되어 있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했던가?
뉴올리언스 출신으로서
일평생 재즈라는 음악장르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하고
활동하다가 일생을 마친
한 음악 거장을 기리기위한
추모공원을 한 도시안에
이렇듯 멋지게 만들어
놓았다니... 루이 암스트롱은
자신의 타고난 재능으로
이름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 위인이었다.
여성유방암 예방과 방지
모금 캠페인 행사에
참가한 참가자들의
가장행렬
7일간의 미국 로드트립 마지막코스
로 들린 루이지애나주 뉴올리언스
이날은 정말 행운이었다
무미건조한 루이 암스트롱
공원 한 바퀴 돌다가
호수좀 거닐다가
동상 몇 개 보고 나왔을 공원에서
뉴올리언스 인근 주민들은
모두 나와 참가했을 행사 모습을
참관할 수 있었으니
분명 행운인건 맞다.
행렬이 끝없이 이어진다.
코로나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마스크 쓰신 분들은
군데군데 어쩌다가
한 두분일뿐
모두 마스크를
쓰지 않는다
ㅋㅋ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애기 아빠
애기 엄마들도
군데 군데 행진을 한다.
손에는 캠페인 피켓을 들고
한쪽에서는 캠페인
전단지도 나눠준다.
인종, 국적, 나이, 성별
상관없다. 뉴올리언스
시민이면 누구나
참가한듯
흰티셔트를 입은 주민단체들
저마다 눈에 띄는 복장으로
캠페인에 동참
길고 긴 행렬이 루이 암스트롱
공원을 한 바퀴 돌고
거리로 빠져 나갔다.
재즈의 거장 루이 암스트롱 공원
의 호수옆을 지나가고 있는
여성 유방암 예방과
모금운동에 참가하고 있는
뉴올리언스 주민들
바쁜 일상일텐데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참가하다니 놀랍다.
반려견들도 주인과 함께
캠페인에 동참했다
ㅋㅋㅋ
산책도 할겸 잘된일
ㅎㅎ
그러고 보니 나도 뉴올리언스
주민들만 참가한
모자보건캠페인에
본의아니게 참가한 셈이다.
뉴올리언스가
낳은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의 이름은
도시 곳곳에서 발견된다.
루이암스트롱 공항이 그렇고,
재즈 투어가 시작되는 루이 암스트롱
공원 또한 그중 한 곳이다.
이곳에서 재즈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오래 전 시간을 느낄 수 있는 건축물,
바, 레스토랑 등에서 벌어지는
재즈 공연을 체험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