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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마음공부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순수 의식의 실현'

by 홍나와 떼굴이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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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 의식의 실현

 

Q. 깨어 있다는 것은 현존하는 것과 같습니까?

: 우리가 존재를 의식할 때는 사실, 존재가 스스로를 의식하는 것입니다. 존재가 자신을 의식하게 되면 그것이 현존입니다. 존재, 의식, 그리고 삶은 동의어이기 때문에 현존이란 자신을 의식하는 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혹은 생명이 자의식을 획득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어에 집착하지 마십시오.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현존하기 전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국 메인주 바다

 

Q.: 방금 당신이 한 이야기는 현존, 즉 궁극적인 초월적 실재는 아직 완전하지 않으며, 지금도 발전 과정을 겪고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신은 개인적 성숙을 위한 시간을 필요로 할까요?

 

A: 그렇습니다. 물질화된 세상의 제한된 시각으로 보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느님은 선언합니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다. 나는 살아 있는 유일자이다." 시간을 초월한 신이 거주하는 왕국이자 우리의 집이기도 한 그곳에서는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가 하나입니다.  만물의 본질은 일찍이 인간의 마음으로는 결코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온전하고 완벽한 상태로 물질화되지 않은 채 존재해 왔으며 영원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서로가 분리되어 있다고 느끼는 우리에게 시간을 초월한 완전함이란 불가해한 개념입니다. 영원한 근원으로부터 발산되는 의식이 하나의 발전 과정에 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우리의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 이 세상 안에서 일어나는 의식의 진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만물은 '존재'를, 신의 본질을, 어느 정도의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돌멩이조차도 미미한 정도나마 의식을 갖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으며, 원자와 분자로 흩어질 것입니다. 모든 것은 살아 있습니다. 태양, 지구, 행성, 동물, 인간 등 만물은 다양한 의식의 표현이요, 모습을 갖고 물질화된 의식의 표현입니다. 세상은 의식이 사고 형태와 물질적 형태를 취하면서 생겨납니다. 이 지구 상의 수많은 생명체를 보십시오. 바닷속에서, 땅 위에서, 대기 중에서, 생명체가 오랜 세월 동안 되풀이해서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도대체 그 목적이 뭘까요? 누군가가, 혹은 무언가가 형태를 갖고 게임을 하는 것 아닐까요? 고대 인도의 선지자들은 스스로에게 그런 질문들을 했습니다.

 

 

그들은, 세상살이란 신이 벌이는 신성한 게임 같은 것(릴라 lila)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게임에서 개별적인 생명체들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게 분명합니다. 바다 속에서는 대부분의 생명체가 태어난 지 몇 분도 되지 않아서 죽고 맙니다. 인간의 형태 역시 꽤 빠른 속도로 먼지로 변하며 언제 존재했느냐는 듯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비극적이거나 잔인한 것일까요? 우리가 스스로 분리된 개체라고 느끼는 한 그것은 진실입니다. 저마다의 의식이란 신의 본질이 형상 속에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는 것임을 잊고 지내는 한, 인생은 분명 비극입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당신 자신 안에 있는 순수 의식으로서의 신의 본질을 깨닫기 전에는 진정으로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당신의 수족관에서 물고기 한 마리가 태어났다고 합시다. 당신은 그 물고기를 '존'이라고 부르고, 출생증명서를 작성하고, 족보를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2분쯤 후에 그 물고기가 다른 물고기에게 잡아먹힌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그것이 비극인 이유는 당신이 '물고기에게 분리된 자아가 있다' 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역동적인 과정에 있는 하나의 단편, 하나의 분자가 추는 춤을 보고 거기에서 분리된 개체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의식은 형상들 안에서 자기 자신을 완전하게 잃어버릴 만큼의 복잡성에 이를 때까지 여러 가지 형태로 변장합니다. 오늘날의 인간들에게 의식은 그렇게 변장된 형태의 것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자신을 오로지 모습으로만 알고 있으므로,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모습이 소멸될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에고의 마음이며, 그로 인해 심각한 부작용이 일어납니다. 마치 진화 과정에서 무언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신이 하는 게임의 일부입니다. 결국 이렇듯 명백한 부작용에 의해 만들어지는 고통의 중압감으로 말미암아, 의식은 모습과의 동일시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고, 자신이 형상일 뿐이라는 꿈에서 깨어나게 될 것입니다. 결국은 자의식을 다시 찾게 되지만, 그 자의식은 그것을 잃어버릴 때보다 훨씬 차원이 깊어질 것입니다.

 

예수는 이런 과정을 '돌아온 탕자' 라는 비유를 들어 설명합니다. 아버지의 집을 떠났던 아들이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털터리가 되어 집에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아들을 전보다 더 사랑합니다. 아들의 상태는 예전과 같으면서도 같지 않습니다. 한결 깊어진 것입니다. 이 비유는 완벽한 무지의 상태에서 시작되어 세속적인 불완전함과 악을 거쳐, 완전한 깨어 있음으로 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제, 마음을 지켜보는 자가 되어 현존이라는 말의 더 깊고 넓은 의미를 알아차렸을지도 모릅니다. 마음을 지켜볼 때마다 당신의 의식은 마음이 지어내는 형상으로부터 후퇴합니다. 그때 당신은 감시자나 목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켜보는 자로서의 의식이 점점 강해지면서 형상 뒤에 있는 순수 의식이 되어 가고 마음의 구조는 허물어집니다. 마음을 지켜보는 자가 되는 것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 우주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의식은 당신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하던 환상에서 깨어나 형상으로부터 후퇴합니다. 이 과정은 언젠가 먼 미래에 연대기적인 시간이 정지할 것임을 예시하는 것이며, 이미 그 사건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건은 바로 '세상의 종말' 입니다.

 

 

의식이 육체와 마음이 지어내는 형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면, 순수 의식이나 깨어 있는 의식, 혹은 현존이 됩니다. 이런 일은 이미 몇몇 사람들에게서 일어났으며, 머지않아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도 일어날 것으로 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마음을 자신과 동일시하고 마음에 의해 움직이는 에고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되지 않으면, 조만간 그것에 의해 멸망하게 될 것입니다. 혼란, 갈등, 폭력, 질병, 절망, 광기가 점점 더 심해질 것입니다. 에고의 마음은 침몰하는 배와도 같아서, 거기에서 내리지 않으면 배와 함께 가라앉게 됩니다. 집단적인 에고는 이 지구 상에 일찍이 없었던 가장 위험하고 파괴적인 실체입니다. 인간의 의식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 지구상에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쉴 수 있는 유일한 출구가 있다면, 가끔씩 생각을 멈추고 그 아래에 있는 의식 차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잠을 자면서 매일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섹스, 알코올, 마약을 통해 과다한 마음의 활동을 진정시키기도 합니다. 대량으로 소비되고 있는 알코올, 안정제, 항우울제, 그리고 불법적인 약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마음의 광기는 지금보다 훨씬 더 두드러질 것입니다. 그런 약들을 빼앗아 버린다면 인류의 상당 부분이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위험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약물이란, 사람을 단지 무기력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할 뿐입니다. 그런 약들이 널리 확산되어 사용된다면, 낡은 마음의 구조가 붕괴되는 일을, 그래서 더 높은 차원의 의식이 출현하는 것을 지연시킬 뿐입니다. 그런 약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자기 마음에 의해 가해지는 나날의 고통으로부터 약간의 위안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생각을 넘어서서 생생하게 깨어 있음으로써 진정 자유로워지는 길을 스스로 가로막고 있는 셈입니다. 먼 옛날 우리의 조상이나 동식물들처럼 마음 아래쪽에 있는 생각 이전의 의식 차원으로 떨어지는 것은 우리가 선택할 사항이 아닙니다. 되돌아가는 길은 없습니다. 인류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만 합니다.

 

의식의 진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형태로 우주 전체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 인간이 진화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주적인 규모에서 보면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의식 안에서는 전혀 잃을 것이 없으며, 스스로를 다른 형태를 통해 표현하면 그뿐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기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고,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바로 이 사실이 지구 상에 새로운 의식의 발판이 마련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일이 아닙니다. 나는 여러분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의 의식이며, 여러분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입니다. 동양에는 '스승과 제자가 함께 배움을 창조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이든 말 자체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말은 진리가 아니며 진리를 가리킬 뿐입니다. 내가 현존하면서 이야기하면, 여러분은 현존 상태에서 나와 만나게 됩니다. 내가 사용하는 단어는 모든 언어가 그렇듯, 예전부터 사용되어 왔고 저마다 쓰임새가 있지만, 단어로서 전달하는 의미하는 별도로 현존의 고주파 에너지를 전달합니다.

 

 

침묵은 현존을 전달하는 훨씬 더 강력한 도구입니다. 내가 말하는 것을 듣거나 읽으면서 단어 사이에, 혹은 그 밑바닥을 흐르고 있는 침묵을 인식하십시오. 그 틈새를 인식하십시오. 침묵에 귀 기울이면 언제 어디서든 직접적으로 쉽게 현존할 수 있게 됩니다. 잡음이 있다고 해도 소리와 소리 사이, 혹은 그 밑바닥에는 언제나 침묵이 있습니다. 침묵에 귀 기울이자마자, 여러분 안에는 즉각 고요함이 창조됩니다.  여러분의 내면이 고요해야만 외부의 침묵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고요함이란 현존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생각의 형태에서 자유로운 의식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지금껏 이야기해 온 생생한 깨달음 또한 그것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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