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안과 밖의 고요함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에 드넓고 고요한 공간을 가지고 있다. 허공처럼 걸림 없고 지극히 고요한 그곳을 접해 보지 못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알 수 없는 사람은 세상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
존재의 심연에 있는 나의 자아는 고요함으로부터 분리되어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이름이나 형상보다 훨씬 더 깊은 차원에 존재하는 '나의 실체'이다.
나의 실체는 고요함이다. 고요함은 무엇인가? 바로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이 글을 인식하고 그 인식을 사고로 변환시켜주는 내면의 허공이며 맑은 마음이다. 맑은 마음이 없다면 나를 인식하거나 사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맑은 마음이 없다면 이 세상도 없다.
내가 바로 맑은 마음이다. 잠시 사람의 모습으로 변장한 맑은 마음이다.
밖이 소란함은 안이 소란한 것이요. 밖이 고요함은 안이 고요한 것이다.
주변에 잠시라도 고요함이 내려앉을 때면 귀를 기울여 보라. 다가온 고요함을 바라보고 주시하라. 밖의 고요함에 귀를 기울이면 안의 고요함이 깨어난다. 마음이 고요해져야 주변의 고요함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밖이 고요함을 알아차리는 그 순간 내 안에 아무런 생각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주시하라. 다만 온 마음으로 바라볼 뿐 아무런 생각도 없다.
밖의 고요함을 의식하는 순간 안의 고요함이 깨어난다. 비로소 당신은 지금 여기 존재하게 된다. 그 순간 당신은 수천년 동안 되풀이해온 인류의 습관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에크하르트 톨레-
나무를 보라. 꽃과 풀을 보라. 당신의 맑은 마음을 그 위에 살며시 올려놓아라. 나무는 얼마나 고요한가. 꽃은 얼마나 생명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가. 자연에서 고요함을 배우라.
나무를 바라보며 그 안의 고요함을 인식할 때 나도 고요해진다. 나는 깊은 차원으로 나무와 연결된다. 고요함속에서 그리고 고요함을 통해서 인식한 모든 것과 나는 하나가 되었음을 느낀다. 그렇게 세상만물과 내가 하나임을 느끼는 것이 참사랑이다.
밖의 고요함은 안의 고요함을 찾는 데 도움은 되겠지만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밖이 소란해도 한 꺼풀만 걷어내면 바로 그 아래에 고요함이 있고, 소란함이 생겨나는 공간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곳이 바로 순수의식이 거하는 곳, 온전히 맑은 마음이 거하는 내 안의 허공이다.
지각 작용과 생각을 한 발짝만 넘어서면 거기 맑은 마음이라는 바탕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맑은 마음을 알고 나면 내면에 고요함이 차오른다.
실은 밖의 고요함 뿐 아니라 소란함마저도 도움이 된다. 어째서인가? 소란함에 대한 마음의 저항을 털어버리고 소란함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을 때 그런 수용이 당신을 내면의 평화로운 허공으로, 고요함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든 있는 그대로 깊이 수용할 때마다 나는 고요해진다. 나는 평화로워진다.
고요한 순간을 주목하라. 하나의 생각이 가고 또 하나의 생각이 아직 다가오기 전의 고요한 순간. 대화 중 생겨나는 짧고 고요한 공백. 피아노나 플루트 연주곡을 들으면서 음과 음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한 순간. 그리고 들숨과 날숨 사이에 존재하는 고요한 순간을 주시하라.
그러한 고요한 순간을 주시할 때 '무언가'를 인식하던 마음은 그저 텅 빈 마음이 되어 내면에 형상을 초월한 순수의식의 차원을 깨운다. 형상이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던 과거의 당신은 이제 없다.
진정한 지혜는 고요함 속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창의력을 개발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면 고요함 속으로 들어가라.
고요함이란 다만 소음이 없는 것. 안에 내용물이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고요함은 지혜이며 모든 형상이 태어나는 근원적 의식이다. 그럴진대 어떻게 그것이 본연의 나와 분리되어 존재할 수 있겠는가? 내가 본연의 나라고 생각하는 나의 형상. 즉 나의 몸이 실은 그로부터 나왔고 그로부터 생명 에너지를 받고 있다.
고요함은 은하계의 뭇 별과 온갖 풀잎들의 실체이다. 이 세상 모든 꽃들과 모든 나무들과 모든 새들과 모든 형상을 가진 것들의 실체이다.
이 세상에서 형상을 여읜 유일한 존재가 고요함이다. 하지만 고요함은 물질이 아니며 이 세상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지금 나는 고요함 속에 머무르는 나무나 인간을 보고 있다. 여기서 보는 자는 누구인가? 그것은 나란 사람이 아니라 훨씬 더 깊은 곳에 있는 무엇이다.여기서 보는 자는 바로 순수의식이다. 순수의식이 손수 창조해낸 것들을 순수의식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는 신이 이 세상을 창조하였고 그것은 보니 좋았더라는 말이 있다. 생각이 끊어진 고요함 속에서 내가 보는 세상 역시 그러하다.
좀더 많은 지식이 필요한가? 좀더 많은 정보가 세상을 구원하는가? 아니면 좀더 빠른 컴퓨터, 좀더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한가? 하지만 인류에게 지금 이 시점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지혜가 아닐까?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이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당신이 모든 것을 멈추고 고요해질 때 지혜가 바로 거기 있다. 그저 보고 그저 들어라. 그 이상은 필요 없다. 당신이 고요해지고, 그저 보고 그저 들을 때 생각은 여읜 지혜가 내면에서 깨어난다. 그러니 고요함이 당신의 말과 행동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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