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은 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속삭이며 더 많이 갖고자 욕심을 부린다. 생각이 내가 되어버릴 때 나는 자꾸만 권태로워진다. 권태롭다는 것은 허기진 마음이 더 많은 자극과 채울 것을 원한다는 것이며 또한 그 허기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권태로울 때 잡지를 집어 들거나 전화를 하거나 TV채널을 돌리거나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쇼핑을 하면서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의 허기를 몸으로 전이시켜 음식을 더 많이 먹어서 일시적으로 만족을 얻는다.
이들과는 달리 권태로운 기분을 바꾸겠다는 생각 없이 그저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사람들이 있다. 맑은 마음이 권태로운 기분에 가 닿으면 한 순간에 그 주변이 트이며 고요함이 들어선다. 처음에는 아주 작았던 틈새 공간이 점점 더 커진다. 그와 동시에 권태로운 느낌이 조금씩 약해지며 그리 대수로운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권태도 스승이 될 수 있다. 나의 본모습이 무엇이고 나의 본모습이 아닌 것은 무엇인지 가르쳐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에크하르트톨레-
나는 '권태로운 사람'이 나의 본모습이 아님을 알게 된다. 권태는 다만 나의 내부 에너지가 습관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 내가 아니다. 슬픈 사람은 내가 아니다. 두려운 사람은 내가 아니다. 권태, 분노, 슬픔, 공포는 '나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단지 마음 상태를 가리키는 지표이며, 늘 가고 오는 것이다.
가고 오는 것은 그 무엇도 내가 아니다.
'나는 권태롭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배고프다. 슬프다. 두렵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앎 그 자체이다. 앎을 통해 지각되는 마음의 상태가 아니다.
편견을 가지고 있다면 '나=생각'이라고 믿는다는 증거이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살아 있는 인간으로 보지 않고 나의 사고가 만들어낸 개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이다. 생생히 살아 있는 사람을 죽어버린 개념으로 격하시키는 폭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맑은 마음에 뿌리를 두지 못한 생각은 이기적이고 비효율적이다. 영리하나 지혜가 결여된 생각 역시 극히 위험하고 파괴적이다. 인류는 대체로 현재 그 상태에 있다. 오늘날 눈부신 과학기술 발전의 원동력이 된 이성적 사고의 팽배는 그 자체로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파괴적 기술이 도처에 범람하는 것은 과학적 사고의 뿌리가 맑은 마음에 자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류는 생각을 넘어서는 진화의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였다. 이것은 시급하고도 중차대한 당면과제이다,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생각'이라는 일체감을 버리고 생각에 완전히 지배당하지 말라는 것이다.
'내면의 나'가 가진 에너지를 느껴보라. 그 즉시 마음의 소란함이 잦아들고 이윽고 그칠 것이다. 손과 발, 배와 가슴에서 내면의 에너지를 느껴보라. 나의 본모습인 생명, 나의 몸을 살아 움직이게 하는 생명을 느껴보라.
그때 나의 몸은 관문이 된다.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과 사고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깊은 생명의 느낌으로 들어가는 문.
단지 머리가 아니라 온몸과 온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생명이 내 안에 있다. 세포 하나하나가 모두 살아 있는 그 생명 속에서는 더 이상 생각이 필요 없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도 생각이 필요하다면 나는 생각할 수 있다. 생각은 여전히 작용한다. 뿐만 아니라 드넓은 지혜가 드러나기 때문에 아름답게 작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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