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함은 불만과
종종 붙어 다니는 감정이지만,
때로는 그것보다 더 강한 분노나
그 밖의 감정적 흔들림이
동반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방식으로 분함은
더 강력한 에너지로 충전된다.
이때 불만은 에고가
스스로를 강화시키는
또 다른 방식인
'대응'으로 바뀐다.
맞서서 반응하거나,
화내고 소란을 피울
그다음 것을
언제나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이
금세 그 대상을 발견한다.
"이건 불법이야."
"어떻게 네가 감히......"
"정말 분해."
이런 사람들은 약물 중독이 아닌
분노와 감정 폭발 중독이다.
이것 또는 저것에
맞서서 반응함으로써
자신의 자아에 대한 느낌을
강화하는 것이다.
오래 지속된 분함은
원한이라고 불린다.
원한을 품고 있는 것은 영구적으로
'대립' 상태에 있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원한은
많은 사람들의 에고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집단적인 원한은
국가와 부족의 정신 속에
몇 세기 동안이나
남아 있을 수 있으며,
끝없는 폭력의 악순환에
기름을 붓는다.
-에크하르트톨레<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원한은
어떤 먼 과거에 일어난
사건과 관계된
강한 부정적 감정이다.
'누가 나에게 한 일.'
'누가 우리에게 한 일'을
강박적으로 계속 생각하거나,
머릿속에서 혹은 분명하게
입 밖으로 내어 반복해
이야기함으로써 그 사건은
늘 살아 있는 상태가 된다.
원한은 또한 삶의
다른 영역들도 오염시킨다.
예를 들어,
원한을 생각하고 느끼는 동안
그것은 부정적인 감정 에너지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고,
눈앞의 사람에 대해 말하거나
행동하는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깊은 원한이
한 가지 있는 것만으로도
삶의 대부분의 영역이
그것에 물들고,
에고의 덫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에크하르트톨레<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자신이
여전히 원한을 품고 있는지,
자기 삶에서
완전히 용서하지 못한 누군가가,
즉 '적'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솔직함이 필요하다.
만약 그렇다면,
생각 차원과
감정 차원 모두에게
그 원한을
알아차려야 한다.
다시 말해,
그 원한을 계속 살아있게 하는
생각들을 알아차리고,
그 생각들에 대한
신체적 반응인 감정을
느껴야 한다.
원한을 내려 놓으려고
시도하면 안 된다.
원한은 내려놓거나
용서하려고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원한이
거짓 자아의식을 강화시켜
에고를 제자리에
유지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목적이 없음을 보게될 때,
용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보는 것이 곧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라." 라는
예수의 가르침은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에고가 지배하는
주된 구조 중 하나를
해체하라는 의미이다.
과거에게는
당신이 현재의 순간에
머무는 것을 막을 힘이 없다.
오직 과거에 대한 당신의
원한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면 원한이란 무엇인가?
오래된 생각과
감정의 응어리이다.
-에크하르트톨레<삶으로 다시 떠오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