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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사찰여행

남해 충렬사

by 홍나와 떼굴이 2019.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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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 후

이순신 장군의 시신이 모셔졌던 곳에

세워진 사당으로 묘비와 가묘가 있다.

 

남해 충렬사는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충무공 이순신의

충의와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사당이다.

 

통영의 충렬사와 함께

'충렬'이란 현판을 처음부터

같이 사용해 왔으며 인조 때 지어졌다.

 

충무공이 전사한 후 그의 시신이

한때 이곳에 모셔졌는데

1633년(인조 11) 김 여빈, 고승후 등

유림들이 옛터에 초옥 1칸을 짓고 

제사를 지냈던 것이 최초의 사당이다.

 

남해 일정 중 첫째 날 다녀왔다.

함께 가보자.

▶주소: 경상남도 남해군 노량로 183번 길 27

▶담당자 전화: 055-860-8631

▶지정 : 사적 제233호

▶지정일 : 1973. 06. 11

▶시대 : 조선시대

1949년 정인보가 짓고

김충현이 쓴 충렬사 한글 비의 비명은

"로량바다는 이충무공 전사하신 데라

여긔에 충렬 사을 세우니라"

라고 되어 있다.

충무공이 순 군한 지 60년이 되던

1658년(효종 9)에 어사 민정 중이

통제사 정익에게 명하여 좁고

초라한 옛집을 헐고 새집을 지었다.

 

그 후 16663년(현조 4)에 통영 충렬사와 함께

임금의 친필로 내려준 현판을 받게 되었다.

1726년 노량 서운을 개원했으며,

1746년 사당 곁에 호충 암이라는 암자를 짓고

화방사의 승려 10명과 승장 1명이

번갈아 와서 사당을 지켰다고 한다.

 

또한 공이 죽은 후 자운이란 승려가

공을 사모하여 쌀 수백 섬을 

싣고 와서 공을 위해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도 유명한데,

자운은 원래 충무공의 밑에

있던 승병이었다.

 

충렬사는 노량 앞바다를

지키고 있는 수호신의 사당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사실들을 기록한

‘유명 조선국 삼도수군통제사 증시 충무 이공 묘비

(有明朝鮮國三道水軍統制使贈諡忠武李公廟碑)’

가 사당 곁에 있다.

비문은 1661년(현종 2)에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썼다.

1663년에 박경지,

김시성 등이 세운 것이다.

1643년 이순신 장군에게

충무라는 시호가 내려졌기 때문에

1633년 남해현령 이정건(李廷楗)이 세운

충민 공비를 철거하고 1793년 5대손 이명상이

이충무공 비를 다시 세웠다.

경내에는

비각, 내삼문, 외삼문, 

관리사 청해루 등이 있고,

 

사당 뒤의 정원에는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 묻었던

자리에 묘가 남아 있다.

1760년 5대손 통제사 이태상이 청해루를 짓고,

1769년 6대손 이한응이 비각을 중수하고

사우를 단청하는 등 후손들이

충렬사의 중건에 많은 힘을 쏟았다.

 

하지만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충렬사는 훼철되었다.

이때 위패는 본당 뒤편에 묻고

제기는 향교로 이관했으며,

토지는 매각했다.

 

충렬사는 비각만 남게 되었다.

 

※ 남해대교 경관조명 점등 시간

: - 하절기 20:00~23:00 -

동절기 18:00~22:00

 

제주도,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 큰 섬,

창선. 삼천포대교 개통 이전까지 

남해의 관문은 동양 최대의 

현수교라 불렀던 남해대교이다.

 

남해대교는 길이 660m,

높이 80m의 아름다운 현수교로

1973년 개통된 지

수십 년이 지만 지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일컬어지고 있다.

남해대교가 가로지른 

노량해협의 거센 물살은

남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산 증인이요,

역사의  마당이었다.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이 시작된 공이었으며,

또 고려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무수한 유배객들이 자신의 적소로

건너오기 위해 나룻배를

탔던 한 맺힌 곳이었다.

남해 노량대교가 놓이기 전,

남해사람들은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노량의 물살을 가로질러 다녀야 했지만

남해대교 개통 이후부터는 승용차로

1~2분이면 거뜬히 물을 건넌다.

 

남해를 육지와 연결한 남해대교를

건너면 벚꽃터널이 반기는데

봄이면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벚꽃의 터널이 장관이라고 한다.

 

벚꽃터널을 지나 노량마을로 내려오면

충무공 이순신이 관음포에서 전사한 후

시신을 잠시 모셨던 충렬사와 

바로 앞바다에 떠 있는 

실물 크기의 거북선이 있다.

 

남해충렬사의 가장 큰 특징은

이순신 장군이 3개월간 묻혔던 자리에

아직도 가묘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1598년 11월 19일

돌아가신 충무공의 유해는

충렬사 자리에 안치되어 있다가 

1599년 2월 11일 전라 땅 고금도를 거쳐

외가 동네인 아산 현충사 자리에

운구되어 안장되었다.

 

충렬사의 역사는 

장군이 돌아가신 지 34년이 지난

1633년에 한 칸의 초사를 건립하여

제사를 봉행하면서 시작된다.

남해충렬사는 규모가 통영 충렬사 

등에 비하면 매우 작지만

 

 

 1973년 6월 11일, 사적 23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으며,

우암 송시열이 짓고 송준길이 쓴

이충무공 묘비와 사우 그리고

충무 공비와 충민 공비,

내삼문, 외삼문을 모두 갖추고 있으며

청해루와 장군의 가묘가 잘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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