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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사찰여행

청도 운문사 : 하심(下心)의겸허한 자세를 본받는 곳!

by 홍나와 떼굴이 202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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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대의 비구니

강원이 있는 운문사는

물 맑고 산 깊은 경북 청도군 운문면

신원리 호거산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제는 운문사에서 흘러나간

운문천 밑으로 운문댐이 생기면서

맑은 시냇물과 호젓한 마을을

스쳐가던 풍광은 사라졌다. 

 

이 길을 따라 북쪽에서 호거산으로

진입하면 아름드리 소나무 밭을 지나

운문사 뜨락에 들어설 수 있다.

새로 지은 대웅보전 앞에서 보면

북쪽의 바위산을 호랑이 머리로 삼고

그 몸이 동쪽으로 해서 남쪽으로 뻗으며

둥글게 운문사를 감싸고 있으니

'호랑이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에서

호가산을 따라온 것이리라.

 

어제 공연 협의차 청도에

내려갔다가 시간이 잠시 남아

청도 운문사 솔바람길도

걸어보고 운문사 경내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함께 보자.

산으로 둘러싼 너른 분지에

남향으로 절을 배치했으니

지금도 25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이

공부하는 승가대학으로 불교계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고 비구니스님 특유의

정갈하고 깔끔한 분위기를 담아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운문사는 어느 도승이 고구려

 평원왕 2년(560년)에 가운데에

자리 잡은 대작감사를 중심으로 

사방에 네 개의 작은 절을 창건하고

오갑사라 부른데서 부터 출발한다.

 

그 대작갑사가 지금의 운문사이고

591년에 중국에서 귀국한 원광법사가

이곳에 머물며 귀산과 추항,

두 화랑에게 세속오계를

내려준 것이

<삼국유사>에 

실려 있다.

그 후 후삼국시대에 이르러

당나라 유학에서 돌아온 보양스님이

왕건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 다시 

대대적 중창을 이루게 되니 왕건은

이 오갑의 땅 500결을 절에 내려주고

937년에는 운문선사라는

이름도 내려주게 된다.

 

운문사라는 이름은

이때부터 내려오게 되고

그 출처는 바로 중국의 

운문스님이다.

「운문어록」이라는 책을 남긴

운문문언(864~949)스님은

운문산에 오래 머물던 스님으로

선종 역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분이다.

이 절 이름을 내려줄 당시

중국에서 크게 선풍을

드날리고 있었기에 왕건은

과감히 살아있는 스님의

법호를 쓴 것이다.

 

이렇게 고려왕조 창업에

한몫 거들어 세력이 커진 운문사는

원응국사(1052~1144)때

전성기를 맞는다.

1129년에 원응국사가

운문사로 내려오자

나라에서 다시 토지 200결과

노비 500명을 내렸으니

500의 선종사찰 가운데

제2사찰이 되었다.

그 후 몽고의 간섭이 노골화되는

1277년 일연스님이 이곳에 내려와

1282년 다시 충렬왕의 부름으로

떠날 때까지 영원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인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된다.

 

청도 운문사의 처진소나무를

보면 두 번 놀라게 된다.

겉에서 본 전체 수관의 모양은

부드럽고 편안한 곡선으로

마치 우리 옛 초가 지붕을

연상케 한다.


​나무 안으로 들어가 보면

두 아름쯤 되는 둥치에서 조금 올라가

여러 갈래의 가지가 용틀임하면서

사방으로 뻗어 기(氣)가 넘친다.

가지들이 상하좌우로 가다가

다시 안쪽으로 굽고 그러다가

다시 위로 솟구치고 솟구치는가 하면

아래로 기묘하게 처져 별천지(別天地)를

이루고 있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막걸리 공양은 30여년 전

쇠약해진 이 소나무를 살리고자

선대 스님들이 고안한 지혜라고 한다.

임진왜란 때 모든 절집이 불탔지만

이곳 처진소나무만은 피했다고 한다.

지난 600여년 동안 천년 고찰

운문사의 역사를 목격한 것도

처진 소나무뿐이다.


​이곳 200여명의 스님들은

이 처진소나무를 스승으로 섬긴다.

이 노송은 자랄수록

가지를 아래로 낮춘다.

스스로를 낮추는 하심(下心)의

겸허한 자세를 본받는 것이다.

이 노송은 이 하심의 모양새로

무한한 진리를 말없이

설하고 있다고 여긴다.

선정(禪定)에 든

소나무라 일컫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조선시대에는 여느 사찰들처럼

임진왜란에 의해 폐허가 되었고

이를 다시 대대적으로 중창한

스님은 설송대사이다.

이때 지은 사적기가 

숙종 44년(1718년)이라고

명기하고 있으니 바로 이 무렵에

운문사는 재건되었다고 하겠다.

 

운문사의 건물 중에는

비로전이 가장 오래된 건축물인데

1653년에 중건된 기록이 확실하고

아름다운 꽃살문,

연꽃과 국화를 아로새긴 수미단,

견실한 건축기법 등으로 

보물 제678호로 지정되었다.

 

이외에도 석등, 석탑, 석불 등

6점의 문화재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만세루 옆에 있는 처진 소나무는

수령이 500여 년이 되는 나무로

멀리서 보면 마치 우산처럼 생기어서

운무사의 운치를 더해준다.

천연기념물 제180호로 지정되어

보호하고 있다.

운문사 관음전은 1105년 원응국사가

3번째 중창한 건물이라고 하나

운문사 전체가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었음으로 그 후

중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관세음보살상 뒤에 걸려있는

관세음보살탱화가

1868년에 그려진 것이고

설송스님이 대대적으로

운문사를 중창한 때도

1700년도 초기였기 때문에 관음전도

이때 중건된 것으로 보여진다.

수미단에 새겨진 조각의 솜씨들도

더 빠른 시기의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은 글자 그래도

모든 중생들의 소리를 관해서

고통을 없애주고

기쁨을 주는 보살이다.

사는 곳이 남쪽의 바닷가

보타낙가산이라고 하며

중생의 간절한 기도에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명칭도 여러 가지이다.

 

흔히 흰 옷을 입은 백의관음이

물가에 앉아있는 그림이 많고

용을 타고 있는 용두관음도 보인다.

운문사 관음전 수미단은

상, 중, 하대로 되어있는

구조를 갖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순해 보이지만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여러 가지 특징도 지니고 있다.

 

고즈넉함과 겨울풍경이

만나는 곳 청도 운문사

경내를 천천히

한 번 걸어보자.

 

선정에 든 처진소나무를

보면서 하심의 겸허한

자세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운문사 경내는 시간을 갖고

천천히 둘러보는 것이 좋다.

처진 소나무 옆으로 보이는

만세루도 크지만 대웅보전

규모 역시 엄청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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