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의 가수이자 배우로,
그의 음악은 미국과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로큰롤의 제왕이라는 평을 갖고 있다.
그는 비주류 장르였던 로큰롤을
대중음아계 주류료 끌어올린
최초의 록 아이콘으로
흑인 음악과 백인 음악을
주 장으로 불렀으며,
로큰롤 외에도 가스펠,
펑크, 발라드, 팝 등의 장르에서
모두 최정상급에 올랐다.
대중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이자
1950년대 시대정신의 상징으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의 한 명이다.
또한 엘비스 프레슬리는
대중 음악 역사상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인기를 끈 시대적 아이콘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일리노이주의
시카고에서 3일을 보내고
동부쪽(뉴욕, 보스턴, 워싱턴)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날씨를 알아보니
뉴욕에는 폭설이 내려 교통이 마비
되었다는 소식도 들리고
보스턴은 강추위로 덜덜 떤다니
관광이고 뭐고? 바로 포기하고
하루를 꼬박 달려
엘비스프레슬리 기념관이 있는
테네시주의 멤피스로
내려왔다.
멤피스로 오는 동안도
눈이 많이 내려 길은 미끄러웠고
남부인데도 추위가 동반되어
어찌 어찌 간신히 밤이 되어서야
겨우 멤피스 힐튼에 도착 짐을 풀고
다음날 아침 일찍 찾아간 곳이
엘비스프레슬리 저택과 기념품상점,
전용비행기가 전시되어 있는
전시장까지...
이곳을 모두 돌아보는데
무려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코로나 시국인데도
엘비스의 향수를 못잊는
미국 각 주에서 달려온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인해전술로 발딛을
틈이 없었을
정도다.
테네시주의 산골
멤피스란 도시는
엘비스 프레슬리로
먹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듯..
<엘비스 프레슬리 기념관 주차장>
기념관 마당에 주차를
하면 되는데 입구에서
주차비를 내고 들어오는
유료시스템이다.
차에서 내려 기념관 입구쪽으로
다가오면 엘비스프레슬리의
생전모습이 붙어 있는
대형 간판이 이곳이
그의 기념관임을
알려준다.
<엘비스 프레슬리 기념관 입구>
이길이 엘비스프레슬리 기념관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 통로이다.
이길을 지나가다 보면
양 옆으로 엘비스프레슬리가
활동하던 시절의 젊은 모습을
커다란 간판에 그렸는지?
좌우로 건물앞에 세워놓아
기념관 입구로 진입하는
내내 엘비스와 함께
동행하는 기분이었다.
1977. 8 사망의 원인에 대한 구구한
추측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나다.
1953년 여름 어느날,
미국 테네시 주 멤피스에 위치한
허름한 벽돌건물 앞에서 기타를
어깨에 맨 백인 청년 한 사람이
서성이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마침내 뭔가를 결심한 듯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찾아왔느냐는
여직원의 물음에 그는 자비로
음반을 하나 녹음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멤피스 음악계를 주도하던
선 레코드의 스튜디오에서는
4달러만 내면 누구나 자작음반을
만들 수 있었다.
청년은 노래 두곡을 불렀고,
음반사의 여직원은 그의 재능에
좋은 인상을 받아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어둔 다음
"좋은 발라드 가수, 꼭 붙잡을 것"
이라고 덧붙여 두었다.
어머니의 생신 선물로
자비 음반을 만든 청년
훗날 이 청년은 그날 만든 자비 음반이
어머니의 생신 선물이었다고 말했지만,
일각에서는 그가 가수가 되려고
자청해서 오디션을
본 것이라고도
해석했다.
청년은 트럭 운전사로 일하고,
밤에는 근처 술집을 돌아다니며
노래를 부르는 생활을 계속했다.
첫 번째 자비 음반을 만든 지
1년이 지난 1954년 여름,
드디어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흑인 창법으로 노래하는 백인 가수"
를 찾던 선레코드의 사장 샘 필립스가
예전에 본 그 청년을
기억해냈던 것이다.
최초의 정식 녹음 작업 도중에
청년은 That's All Right (Mama)라는
유명한 곡을 장난삼아 자기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바꿔 불렀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은 모두
그 노래를 듣고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7월 10일 밤 9시 30분경,
그 노래가 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방송되자
청취자들의 엽서와 전화가 폭주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라
멤피스 인근에서 이름을 알렸고,
그윽한 눈매와 냉소적인 미소로
십대 소녀 팬들의 인기를 독차지했다.
곧이어 그는 일명 ‘대령’으로 통하는
톰 파커를 매니저로 맞이하고
대형 음반회사인 RCA와 계약했다.
1956년 초에 Heartbreak Hotel이
빌보드 차트 1위를 차지한 것을 시작으로
Hound Dog, Don't Be Cruel,
Love Me Tender 등이
연이어 히트했다.
아울러 노골적으로 엉덩이를 흔드는
특유의 몸동작은 큰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남부의 가난한 백인 청년에서
로큰롤의 슈퍼스타로
엘비스 애런 프레슬리는
1935년 1월 8일에 미시시피 주
두펄로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쌍둥이였지만
형이 태어나자마자
사망했기 때문에
외아들로 자라났다.
프레슬리의 부모는 이른바
'힐빌리'로 불리는 남부의
가난한 백인 계층이었다.
어머니는 목화밭이나
공장에서 일해 생계를 유지했고,
아버지는 한때 밀주 판매 혐의로
옥살이를 했다.
엘비스는 그 어머니의 음모와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은 것으로 여겨지며,
아버지가 무능하고 폭력적인 까닭에
모자관계가 유별나다 싶을
정도로 돈독했다.
1948년에
엘비스의 가족은
테네시 주 멤피스의
빈민가로 이사한다.
고등학교 졸업한 후에
트럭 운전 등의 일을 하던
엘비스는 앞서 설명했듯이
우연한 기회에 가수의 길에
들어섰다.
초기의 엘비스는
말론 브랜도나 제임스 딘 같은
유명 배우의 냉소적인 반항아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차용했다.
특유의 외모도 나름의 계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여드름을 가리려고
두툼한 메이크업을 선호했고,
눈을 돋보이게 하려고 마스카라와
아이섀도를 상용했으며,
나중에는 코에 약간의
성형수술도 받았다.
머리카락도 원래는
짙은 금발이었지만,
무대에 설 때면 항상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엘비스의 초기 활동에서는
음악 못지않게 영화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엘비스는
1956년부터 1969년까지
모두 31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대부분 뮤지컬이거나 노래를
중요한 소재로 삼은 영화였지만,
어디까지나 가수로서의 인기에 편승해
졸속으로 제작된 것이다 보니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혹평을 받기 일쑤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엘비스가
평생 춤에는 능숙하지 못해서,
영화 촬영 중에도 종종 안무가가
가르쳐 준 스텝을 까먹고
쩔쩔 맸다는 점이다.
그가 종종 무대에서 선보인
'엉덩이 춤'이 몰고 온
센세이션을 생각해 보면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군 복무와 인기의 쇠퇴,
그리고 은둔 생활과 비극적인 최후
1957년 말,
엘비스는 징집영장을 받았다
(미국은 1973년까지 징병제를 실시했다).
국방부에서는 연예 사병 근무를 제안했지만
엘비스는 외부의 시선을 의식해
그냥 일반 전투병으로
복무하기로 결정한다.
영화 제작으로 인해
한 번 입대를 연기한 그는
1958년 3월 24일에
머리를 깎고 군복을 입는다.
군 복무 기간 동안에
가장 큰 사건은 어머니의 사망이었다.
엘비스는 이 사건으로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으며,
일각에서는 이후 그의 은둔과 기벽
역시 이 중대한 사건에서
비롯된 결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해 가을, 엘비스는
기초 훈련을 마치고
서독의 미군 기지로 배치되어
18개월 동안 근무했다.
훗날 아내가 된
프리실라 블라우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1960년 3월 2일에 전역한 엘비스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그러나 군 복무 중에도
여전했던 인기는 엘비스가
과거의 반항아 이미지를 벗어버리고
보다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부터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십대외에 장년층에게도 인정받으며
인기의 폭은 넓어졌지만,
그 열기는 예전만 못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엘비스는
음악보다 영화 쪽에 전념했고,
촬영이 없을 때에는
멤피스의 저택
그레이스랜드에
은거했다.
이른바
'멤피스 마피아'로 통하는
그의 친구들이
일종의 친위대 노릇을 하며
갖가지 향락의 뒤치다꺼리를
해주는 까닭에 종종
구설수에 올랐다.
< 엘비스 프레슬리 기념관+
저택 입장권 티켓부쓰>
기념관 안으로 들어서면
엘비스프레슬리 저택인
'그레이스랜드'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장티겟을 끊은
부쓰가 나온다.
<안내데스크>
게스트 서비스를
해주는 부쓰
< 엘비스 프레슬리 기념품 상점>
그레이스랜드 입장티켓
끊는 부쓰 오른쪽으로
가면 기념품상점이 있는데
이곳에 진열되어 있는
모든 상품에는
엘비스프레슬리의
얼굴사진이
박혀 있다는 것
딸이 키타모형 하나
구입했다.
이곳 다리를 지나면
엘비스가 생전에 타고 다니던
전용비행기 몇 대를
전시해 놓은 장소가
나온다.
< 엘비스 프레슬리가 타고 다니던
전용비행기 전시장>
1960년대의 엘비스는 음악적으로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데뷔 시절의 인기 요인이었던
빠른 템포의 곡에서 벗어나
It's Now or Never,
Are You Lonesome Tonight
같은 스탠더드 팝 계열의 곡으로
변신을 꾀했지만, 팬들의 반응은
이전만큼 열정적이지 않았다.
비틀즈를 위시해 크림, 지미 핸드릭스,
도어스 등이 줄줄이 등장해서
로큰롤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던 그 즈음,
엘비스는 30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이미 한물 간 스타로 여겨졌다.
특히 비틀즈는
1965년의 미국 투어 도중에
그레이스랜드에서
엘비스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갖는다.
그러나 정작 이들의 우상 엘비스는
1961년 이래 영화 말고 음악 공연은
한 번도 하지 않고 있었다.
1967년 5월 1일, 엘비스는
프리실라와 결혼한다.
이듬해에 외동딸 리사 마리가 태어났지만,
결혼 생활은 5년 만에 파경을 맞는다.
1968년에 엘비스는
컴백 공연을 통해 재기에 성공했고,
1973년에는 인공위성 생중계인 하와이 공연에서
다시 한 번 슈퍼스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였다.
하지만 그의 건강상태는
이미 한계에 이르러 있었다.
그 한 해 동안 엘비스는
무려 네 번이나 죽을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넘겼다.
각성제로 시작한 약물 남용이
점점 더 강력한 약을 섞어 먹는
지경에 이르며 그의 몸을
망가트렸던 것이다.
1977년 8월 16일,
엘비스는 자택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된다.
급히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미 사망한 다음이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지만,
일각에서는 그의 약물 남용이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한편,
관계자들은 어째서인지
극구 말을 아끼는 바람에
지금까지도 종종 논란이
되고 있다.
갑작스런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은 물론이고 전 세계가
그이 죽음을 애도했다.
오늘날 멤피스는 미국은 물론이고
세계 곳곳에서 팬들이
순례하는 엘비스의
성지가 되었다.
엘비스는 죽었지만 그의 전설은
영원히 살아있다.
엘비스의 약물남용 문제는
오래 전부터 숱한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지금은 주로 암페타민 등의 각성제를
남용한 것이 사실로 인정된다.
그가 사망할 즈음에는
재정 상태 역시 적잖은
문제가 있었다는 점은
또 다른 의외의 사실이다.
무절제한 사생활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엘비스가
수입의 절반 이상을 매니저인
'대령'에게 뜯기는 전형적인
노예계약의 희생자이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로큰롤의 슈퍼스타라 하더라도,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연예계의
비리 앞에서는 무력했던 셈이다.
엘비스 사후에 유족들은
결국 '대령'을 상대로 법적 투쟁을
벌여 고인의 권리를
일부나마 회복했다.
오늘날 엘비스 관련 산업은
매년 수천만 달러의 수익을
내고 있다.
한때나마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은
막대한 부와 명예를 거머쥔 엘비스였지만,
그의 내면에는 그 모든 것이 졸지에
거품으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자리잡고 있었다.
군 복부 시절, 그는 자신의 인기가
뚝 떨어져서 결국 모든 것을 잃고
예전과 같은 빈털터리가 되는
악몽을 자주 꾸었다.
"힘든 일, 눈물, 잠 못 이루는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사람들은 몰라요."
엘비스의 말이다.
"엘비스 프레슬리로 존재하는데
너무 지쳤단 말이에요."
그의 이런 발언 때문일까?
지금도 사람들은 엘비스가 죽지 않았으며
어디선가 운둔 생활을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엘비스는 죽었지만 그의 전설만큼은
결코 죽지 않았다는것을
보여주는 일화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인물세계사>
20세기를 대표하는
미국의 스타 엘비스 프레슬리가
1957년부터 살기 시작해
1977년 약물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았던 집이다.
테네시 주 멤피스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의 무덤도 이곳에 있다.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이루어진 저택이다.
현재 2층에 엘비스의 외동딸인
리사 프레슬리가 거주하고 있으며,
2층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은
일반에게 공개되고 있다.
그레이스랜드는 지난 2006년
국가유적으로 등록된 바 있다.
< 엘비스 프레슬리 저택 그레이스랜드>
그레이스랜드 저택까지는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
엘비스 프레슬리가 생전에 거주하던
그레이스랜드 저택 외관
엘비스 프레슬리의
아내와 딸 리사 프레슬리
의 어릴적 사진
고인이 생전에 사용하던
다이닝룸
지하의 미디어룸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엘비스 프레슬리 액자.
2층은 개방하지 않고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리사 프레슬리가
거주하고 있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오피스로 사용했던 공간
엘비스 프레슬리가
군에 입대할 때
입었던 의상
엘비스 프레슬리가
공연할 때 늘
입었던 의상
생전에 그의 업적들..
그레이스랜드 저택의
야외 수영장
그가 입었던 독특한
디자인의 무대의상들..
엘비스 프레슬리가
고이 잠들어 있는 무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