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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마음공부

고요함의 지혜:에크하르트 톨레 5. 나의 참모습

by 홍나와 떼굴이 2022. 8.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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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은 당신의 참모습과 분리될 수 없다.

 

당신의 삶에는 중요한 것이 많다. 하지만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당신이 성공했나 실패했나가 중요하다. 또한 당신이 건강한지 아닌지. 교육을 받았는지 못받았는지가 중요하다. 당신이 부자인지 가난한지가 중요하며 그것은 분명 당신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 상대적 차원에서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중요하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절대적 차원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들보다 더 더욱 중요한 무언가는 바로 당신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그 실체를 찾는 것이다. 당신 스스로 만들어낸 일시적인 자아상을 넘어서 존재하는 그것을.

 

내면의 평화로움을 찾는 방법은 삶의 환경을 고치고 바꾸는 것이 아니라 가장 깊은 곳에 존재하는 당신 본연의 모습을 깨닫는 것이다.

 

다음 생에서도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면 환생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은 '나''우리'에 대한 잘못된 관념에서 나온다. 그것이 본연의 모습을 가려버린다. 내면의 실체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언제나 결국 자신을 고통 속에 가두고 만다. 간단한 이치이다. 내가 진정 누구인지 모를 때 나의 아름답고 성스러운 존재를 대체하기 위해 생각이 만들어낸 자아상에 매달리는 것이다. 두려움과 욕망에 지배당하는 자아에.

 

이제 그런 잘못된 자아상을 보호하고 치장하는 것이 내삶의 목적이 된다.

 

-에크하르트 톨레-

사람들이 흔히 사용하는 말의 구조 속에는 이미 자신의 참모습을 모른다는 사실이 드러나 있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는 말. '나의 삶'이라는 말 속에는 마치 삶이나 생명이 소유하거나 잃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있다. 나는 생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내가 바로 생명이다. 우주 전체에 충만한 '한 생명' 또는 '한 의식'이 잠시 한 형태를 취하여 돌멩이로, 풀잎으로, 동물로, 인간으로, 별로, 은하계로 체험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이미 그런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껴보라. 당신은 이미 그것임을 느낄 수 있는가?

 

세상사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고 집을 한 채 짓고 전문가가 되는 일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차 한 잔을 만드는 데도 시간은 필요하다. 하지만 삶의 가장 본질적인 일이자 진정 중요하고 유일한 일에는 시간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것은 바로 나를 깨닫는 일이다. 그것은 외형을 초월하고 이름과 형상을 초월하고, 나의 역사와 이야기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본연의 나를 아는 일이다.

 

과거나 미래에서는 나를 찾을 수 없다. 나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지금 이 순간이다.

 

구도자들은 깨달음과 자기실현을 미래에서 찾는다. 구도자가 된다는 것은 미래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당신이 그렇게 믿는다면 그것은 당신에게 진실이 된다. 다시 말해서 본연의 당신이 되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님을 깨닫는 그 순간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무를 보면 나무가 거기 있음을 안다. 생각이나 감정을 인식할 때는 생각이나 감정이 거기 있음을 안다. 기쁘고 고통스러운 체험을 할 때는 그런 체험이 거기 있음을 안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인 듯 느껴지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미묘하고도 근원적인 착각을 담고 있다. 이는 언어를 사용할 때면 피할 수 없는 착각이다. 사고와 언어는 날카로운 이분법을 적용해 다른 것들과 분리된 인간존재를 만들어낸다. 그런 인간이 실제로는 없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진실은 나는 나무를 인식하는 사람도 아니고, 사고 감정 체험이 거기 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도 아니다 나는 맑은 마음이다. 나는 순수의식이다. 나를 통해 사고 감정체험은 나타날 수 있다.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이 맑은 마음임을 알 수 있겠는가? 그 안에서 당신 삶의 모든 내용이 하나씩 전개되는 그런 맑은마음.

 

당신은 말한다. '나는 자신을 알고 싶어.' 하지만 당신이 바로 '나'이다. 당신이 바로 '앎'이다. 당신이 바로 그를 통해 모든 것이 알려지는 '순수의식'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스스로를 알 수는 없다. 그것은 다만 그것 자체일 뿐.

 

그 이상으로 알아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모든 앎은 다 그것에서 나온다. '나'는 그것 자체를 지식이나 순수의식의 대상으로 만들 수가 없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 자신에게 어떠한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이 바로 에고적 정체성이라는 착각이 일어나는 이유이다.  이미 당신은 마음에서 당신 자신을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던 것이다. 당신은 말한다. "그게 나야." 그리고는 당신 자신과 관계를 만들어가면서 남들과 당신 자신에게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이다.

 

당신 자신이 현상계의 존재들이 생성되는 맑은 마음임을 알 때 당신은 현상계의 종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제 당신은 상황과 장소와 조건 속에서 자아상을 찾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는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만물이 그 무거움과 심각함을 떨궈버린다. 당신 삶에 슬며시 장난기가 들어온다. 이제 세상은 우주의 춤이다. 형상의 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본연의 모습을 알 때 살아 있는 평화로움이 언제나 거기 있다. 그것을 기쁨이라 불러도 되겠다. 기쁨이란 바로 그렇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평화로움이니까. 그것은 생명이 아직 형상을 취하기 이전의 모습. 생명의 실체로서의 당신 자신을 아는 기쁨이다. 그것이 바로 존재의 기쁨. 당신 본연의 모습으로 사는 기쁨이다. 

 

물이 고체, 액체, 기체로 존재하듯이 순수의식도 '동결되어' 물체로 존재하고, '액체화되어' 마음과 생각으로 존재하고, '형상을 여의어' 순수의식으로 존재한다.

 

순수의식은 형상화되기 이전의 생명이다. 그 생명이 '당신'의 눈을 통해 형상의 세계를 본다. 순수의식이 당신이니까. 당신이 그런 존재임을 알고 나면 당신은 세상만물속에서 당신 자신을 보게 된다. 그것은 온전히 맑고 명료한 인식의 상태이다. 이제 당신에게는 무겁고 고통스러운 과거가 없다. 당신의 체험을 걸러주고 해석해주는 관념의 필터 역할을 하는 과거가.

 

아무런 해석 없이 지각작용이 이루어질 때 비로소 당신은 지각하는 주체가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다. 언어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은 깨어 있는 고요함의 장 안에서 지각작용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당신'을 통해서 형상을 여읜 순수의식이 자기 자신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사람들의 삶은 욕망과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다.

 

욕망은 무언가를 '더하여' 좀더 풍성해지려는 욕구이다. 반면 모든 두려움은 무언가를 '잃어' 자신이 작고 초라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이렇게 더하고 잃어버리는 두 가지 활동은 생명이란 것이 본래 줄 수도 빼앗을 수도 없다는 사실을 은폐한다. 풍요한 생명은 이미 지금 이 순간 당신 안에 존재한다.

 

-에크하르트 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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