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의도는 또 이 나라 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 땅이기도 하다. 권력자에게 빼앗긴 농토를 찾기 위해 주민들이 일심 단결하여 330년이나 싸웠고 마침내 땅을 되찾은 불굴의 정신이 깃들어 있는 섬이다. 그 하의도 농민들의 불굴의 정신이 김대중이란 인물을 키운 자양분이었을 것이다.
하의도에 자리한 농민운동기념관은 한국 농민 운동사의 흔적을 간직한 고요한 증거들로 가득하다. 농기구와 생활용품들이 전시된 조용한 전시실은 과거 농민들의 삶과 투쟁의 이야기를 속삭이며,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이러한 배움과 감동을 담아 블로그에 기록하고자 한다. 하의도의 푸른 하늘과 넓은 들판이 이야기의 배경이 되어주는 가운데, 농민 운동의 열정과 눈물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1. 하의도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고향 섬이다. 하지만 하의도는 330년 간 토지반환운동에서 승리한 한국농민운동사의 기념비적인 땅이기도 하다. 330년 동안의 싸움은 공주로부터 비롯됐다. 정명공주(1603~1685). 하의 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주민들은 공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기 위해 3백여 년을 싸웠다.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한국의 대표적인 농민항쟁이었다. 정명공주는 선조의 정실에게서 난 첫째 딸이자 인조의 고모다. 또 광해군에게 폐비된 인목대비의 딸이자 광해군에게 죽임을 당한 영창대군의 누이다. 인목대비가 서궁으로 폐출됐을 때 함께 감금생활을 했다. 광해군이 폐위된 뒤 삼촌의 왕위를 찬탈한 인조에 의해 다시 공주로 복권됐다.
▲하의도 토지항행 공적비: 잊혀진 역사의 속삭임, 하의도 농민운동공적비에서 느껴보는 뜨거운 숨결
2. [하의도 토지항쟁 공적비군]: 하의도에는 하의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농민들의 역사와 저항 정신을 기리기 위해 2009년에 개관한 하의 3도 농민운동 기념관이 있다. 하의3도 농민운동은 간척으로 생긴 토지로 부당이득을 취하려 했던 조선시대 세도가에 대한 항쟁에서부터 일제강점기 소작료 거부 등 오랜 시간 투쟁으로 이어진 역사이다. 기념관 옆 마당에는 토지 운동 과정에서 섬 주민들을 위해 공을 세운 사람들의 공적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 3기와 하의도 주민들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사람들의 공적비 2기가 있다.
마을 제사 때 황소를 기증한 문응두를 기리기 위해 1885년에 세운 공적비와 흉년으로 주민들의 생활이 어려울 때 구휼에 힘쓴 권재찬의 영세불망비(1903년), 조선 선조 맏딸 정명공주의 8대손 홍우록 등과 하의도 토지를 두고 법정 공방을 벌일 때 하의 농민들의 편에서 활동했던 당시 군수 김동우, 일본인 변호사 고노오 토라노스케, 사무원 남만웅의 영세불망비(1912년)가 그것이다. 이들 비석은 웅곡선착장에 있었다가 현재의 위치로 옮겨졌다.
3. 인목대비 사후에 궁중에서 비단에 쓰인 백서(帛書) 세 폭이 발견됐는데 임금(인조)을 폐하고 다시 세우자는 내용이었다. 정명공주는 이 백서의 배후로 의심받고 곤경에 처해졌으나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 등의 구명으로 위기를 넘겼다. 인조 사후 효종, 현종, 숙종 3대 동안은 왕실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대접을 받고 살았다. 정명공주는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결혼했는데 숙종 때의 이조참판 홍석보(洪錫輔)는 그녀의 증손이며, 수찬 이인검(李仁儉)은 외증손이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 씨와 홍봉한, 홍인한, 원빈 홍 씨 등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었다. <경국대전>은 공주의 집이 50간을 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정명공주의 집은 200 간이 넘었고 경상도에만 8,076 결의 넓은 땅을 하사 받는 등 최고의 호사를 누렸다 한다. 그런 정명공주에게 하의 3도 농민들의 농토까지 하사됐다.
4. 선사시대부터 고려시대 말까지 한국의 섬들에는 사람들이 살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국가에서는 공도(空島)정책을 실시했고 섬은 무인지경이 됐다. 국법으로 금하니 섬에서 사는 것 자체가 죄가 되었다. 섬과 바다를 포기했던 조선 왕조가 임진왜란을 전후해 섬의 중요성을 재인식하고 다시 주민 거주를 허락했다. 그래서 대부분 섬들의 사람살이 역사는 삼사백 년에 불과하다. 공도정책 이전 수천 년 이어온 섬살이의 역사는 흔적도 없어지고 말았다. 황폐화된 섬에 들어간 사람들은 다시 황무지를 개척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사지을 땅을 만들었다. 국법에도 미개간지는 개간한 사람의 소유권을 인정해 줬다.
5. 330년간의 투쟁 : 하의 3도(하의도, 상태도, 하태도) 역시 임진왜란 직후 내륙에서 이주한 주민들이 황무지를 개간하고 갯벌을 간척해 농토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왕은 주민들이 개간한 땅을 강탈해 버렸다. 1623년, 인조는 하의 3도의 개간된 땅 24 결을 정명공주에게 하사했다. 그래도 인조는 정명공주의 4대 손까지만 세미(稅米)를 받도록 조건을 달았다. 하지만 정명공주의 4대 손이 사망한 이후에도 홍 씨 가문은 하의도 주민들에게 농토를 돌려주지 않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홍씨 가문은 하의 3도 주민들이 나중에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아 갔다. 공주의 5대손 홍상한은 섬 주민들이 새로 개간한 땅 140결에 대해서까지 권리를 주장해 결세를 거두어 갔다.
6. 결국 주민들은 국가와 홍씨 집안 양쪽에 이중으로 세금을 바쳐야 했다. 일토양세(一土兩稅)였다. 수탈이 극에 달하니 저항은 거셀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이 새로 개간한 땅마저 빼앗긴 주민들은 다시 땅을 되찾기 위해 대를 이어 가며 싸웠다. 하지만 권세를 지닌 홍씨 가문에 번번이 패했다. 구한말 하의 3도의 땅은 홍씨 가문에서 내장원으로, 내장원에서 다시 홍씨 집안으로, 또 일본인 우근권좌위문(右近勸左衛門)에게, 다시 덕전미칠(德田彌七)에게로 넘어갔다. 하의 3도 주민들은 도세 납부 거부와 각종 소송, 농민조합운동 등을 통해 끊임없이 저항하고 투쟁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회의 유상반환 결정을 얻어내 1956년에야 비로소 농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물경 3백30여 년에 걸친 투쟁에서 승리한 것이다.
7. 신안군 하의도는 유인도 9개, 무인도 47개로 구성된 하의면의 본 섬이다. 면적 14.46㎢, 해안선 길이 32㎞의 섬이다. 백과사전이나 하의도 안내 책자 등에는 하의도가 연화부수형의 지형인데 연꽃으로 만든 옷 모양이라 하의도라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하의도(荷衣島)의 옛 이름은 고이도 혹은 고의도였다. 일본 헤이안시대의 승려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고이도(高移島)로, <삼국사기> 효공왕(?∼912) 3년조에는 고이도(皐夷島) 도로 나온다. <고려사> 권 1 건화 4년(914) 조에는 고의도(皐衣島)로 표기되어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 세종 30년 8월 27일 기사에는 하의도(河衣島)로 나온다. 그러므로 소개된 지명 유래는 별 근거가 없다. 고이도에서 고의도, 고의도에서 또 하의도로 표기가 변해온 것이다.
8. 하의도의 잔잔한 바람과 우윳빛 갯벌, 푸른 하늘 아래 위치한 농민운동기념관은 한국 농민들의 역사적 투쟁과 정신을 보존하고 기리는 공간으로, 방문객에게 깊은 감동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저는 그 역사의 무게를 느낄 수 있었고, 우리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그 과정을 되돌아볼 수 있었다. 이 소중한 경험을 나누고자 블로그에 기록함으로써, 다른 이들도 이 같은 깨달음을 얻고, 우리의 뿌리와 역사를 기억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것은 단순히 과거를 돌아보는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우리의 역사적 맥락을 직접 체험하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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