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침례교회 목사이자
흑인해방운동 지도자.
조지아주 애틀랜타 출생.
침례교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48년 모어하우스대학 및 펜실베이니아주
체스터의 크로저신학교를 졸업했다.
그 동안에 비폭력 저항과 인종차별 철폐 및
식민지 해방과 사해동포론등을 주창한
간디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어 보스턴대학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1954년 앨라바마주 몽고메리의 침례교회 목사로 취임하였다
재직 2년째인 1955년 12월,
시내버스의 흑인 차별대우에 반대하여
5만의 흑인 시민이 벌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투쟁'을
지도하여 1년 후인 1956년 12월에 승리를 거두었고,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SCLC)를 결성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출처: 두산백과>>
애틀란타 다운타운지역내에 있는
흑인해방운동 지도자인 마틴 루터 킹
국립역사공원에 다녀왔는데 함께 보자.
트럼프, '킹 목사 출생지'
국립역사공원으로 지정
2018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흑인 민권 운동가인
고(故)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조지아주 애틀랜타 출생지를
'국립역사공원'(National Historical Park)으로
지정하는 데 서명했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조지아대와 앨라배마대 간에 벌어진
미 대학풋볼 내셔널챔피언십 경기 관람을 위해
조지아주에 도착한 직후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킹 목사의 조카딸인
알베다 킹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명했다.
킹 목사 출생지는 국가사적지로 지정돼 있었으나
'국립역사공원'으로 격상된 것이다.
미 흑인 민권운동의 살아있는 전설
존 루이스(민주.조지아)하원의원이
주도한 것으로 전해졌다.
루이스 의원은 킹목사와 뜻을 함께하며
흑인 참정권 운동의 상징인 1965년
앨라배마 셀마 평화 행진을 주도한
대표적인 인권운동가다.
<<출처: 연합뉴스>>
호건 기들리 백악관 부대변인은
"킹 목사는 삶과 일을 통해 미국을
더욱 공정하고 자유롭게 만들었다.
이번 국립역사공원 지정은 미래 세대들에게
킹 목사의 얘기를 계속 말해줄 것"
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1929년 1월에 태어난 킹 목사는
1950~1960년대 흑인 인권운동을 주도했으며,
특히 지난 1963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I have a dream)란 명연설을 통해
인종차별 철폐와 인종 간 공존을 호소했다.
1964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킹 목사는 지난 1968년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흑인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암살돼 3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출처: 연합뉴스>>
그 직후 남부
그리스도교도 지도회의를 결성하고,
1968년 4월 테네시주의 멤피스시에서
흑인 청소부의 파업을 지원하다가
암살당하기까지, 비폭력주의에 입가하여
1964년에는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주요 저서에 몽고메리 보스 보이콧 투쟁에
관하여 쓴 <<자유를 향한 위대한 행진>>
(1958)외에도 <<우리 흑인은 왜 기다릴 수 없는가>>
Why We Can’t Wait》(1964)
《흑인이 가는 길》(1967) 등이 있다.
<<출처: 두산백과>>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긴 조사(弔辭)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상 수상자(1964년. 35세.
역대 최연소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는 것과
그 밖에 많은 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도
언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날, 마틴 루서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으며,
전쟁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기 위해 애썼으며,
인간다움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몸바쳤다는 것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68년 2월 4일, 마틴 루서 킹은
고향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위와 같이 설교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이 설교는 그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다.
그로부터 두 달 뒤 그는 암살당했다.
1968년 4월 9일 역시 에버니저 교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는 마틴 루서 킹의 아내
코레타의 뜻에 따라, 2월 4일의
설교가 녹음된 테이프를 틀었다.
당시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이날을 국장일로 선포했다.
이 설교는 ‘드럼메이저(Drum Major) 설교’
또는 ‘나는 정의를 위한 드럼메이저입니다
(I Am a Drum Major for Justice)’라는
제목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드럼메이저는 본래 행진 악대나 고적대의
맨 앞에 나서 이끄는 사람을 뜻한다.
마틴 루서 킹은 ‘드럼메이저 직분’
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지도자로서의 직분, 소명을 뜻한다.
2월 4일의 설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만일 여러분이 제가 드럼메이저였다고 말하고 싶다면,
정의에 헌신한 드럼메이저였다고 말하십시오.
평화에 헌신한 드럼메이저였다고 말하십시오.
그 밖의 다른 것들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저는 다만 헌신했던 삶을 남겨 두고 싶습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독일 여행 중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를
기리기 위해 이름을 바꾼 아버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난
마틴 루서 킹 주니어의 아버지는
목사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Sr),
어머니는 알버타 윌리엄스 킹이었다.
아버지의 본래 이름은 마이클 킹 주니어였으나,
1934년 유럽 여행에서 독일을 방문하면서
독일 프로테스탄트 지도자,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마틴 루터)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이들 부자(父子)는 마틴 루서 킹
‘시니어’와 마틴 루서 킹 ‘주니어’가 되었다.
그의 ‘드럼메이저 설교’를 좀 더 들어보자.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인정받고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이걸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위대한 이는 다른 이들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걸 말입니다.
이야말로 위대함의 새로운 기준입니다. ……
모든 사람은 위대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섬길 수 있으니까요.
섬기는 데는 대학 학위가 필요 없습니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알 필요도 없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몰라도 섬길 수 있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에 밝아야
섬길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필요한 것은 은혜로 충만한 마음,
사랑으로 움직이는 영혼입니다.
당신은, 우리 모두는 섬기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출처: 인물세계사>>
마하트마 간디로부터
비폭력 저항에 대한 신념을 얻다
‘드럼메이저’ 설교가 있기
5년 전인 1963년 8월 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광장에
25만여 명의 군중이 모였다.
군중의 눈과 귀는 모두 연단에 선
마틴 루서 킹을 향했다. 이날 그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
라는 구절로 유명한 연설,
미국의 인권 운동사는 물론
미국 역사에 길이 남을 연설을 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 이 나라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것을
자명한 진실로 받아들이고,
그 진정한 의미를 신조로 살아가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 위에
예전에 노예였던 부모의 자식과
그 노예의 주인이었던 부모의 자식들이
형제애의 식탁에 함께 둘러앉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언젠가는 불의와 억압의 열기에
신음하던 저 황폐한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평등의 오아시스가 될
것이라는 꿈입니다.
나의 네 자녀들이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평가받는 그런 나라에
살게 되는 날이 오리라는 꿈입니다.”
<<출처: 인물세계사>>
이 역사적 연설에서 마틴 루서 킹은
증오에 바탕을 둔 폭력적 저항이 아니라
보다 높은 영적 차원에 바탕을 둔
비폭력 저항을 강조했다.
“비탄과 증오로 가득 찬 술잔을 들이키는 것으로
자유를 향한 갈증을 달래려 하지 맙시다.
위엄과 원칙이 있는 높은 곳을 향한
투쟁을 영원히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창의적인 항거가 폭력으로
변질되게 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 또다시, 우리의 힘,
이 영혼의 힘과 맞닿을 수 있는
저 높은 곳까지 올라가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의 이러한 비폭력 저항에 대한
신념에 영향을 미친 것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였다.
개인의 내면 깊숙한 곳의 '영혼의 힘'에 바탕을 두어,
고난을 끈기 있게 버텨내며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는
대중적 저항 운동의 모델이 바로 간디였던것,
마틴 루터 킹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게도
영향을 받았다. 소로는 개인적 신념이나
사회적 정의에 어긋나는 것이 분명한,
국가의 조치나 법령에 대해 비폭력적으로
주장한 것은 정당하다고 주장했다.
마틴 루터 킹은 "비폭력의 철학이 아니었다면
미국 남부의 여러 거리에 피의 물결이
출렁거렸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마틴 루터 킹은 1959년 인도를 방문하면서
간디의 비폭력 저항 노선에
더욱 깊이 공감하게 되었다.
인도에서의 마지막 날 밤 그는
라디오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 “인도에 머물면서 나는
비폭력 저항의 방법이야말로,
정의와 존엄을 위해 투쟁하는
억압받는 사람들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굳게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는
우주의 도덕적 질서 안에 깃든
보편적 원리를 일생을 통해
온 몸으로 실천했습니다.
그 원리는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분명하고 불가피한 것입니다.”
<<출처: 인물세계사>>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무색하게 만드는
'흑인과 개는 사절' '백인만 출입할 수 있음'
미국에는 두 가지 얼굴이 있다.
다양한 이질적인 요소들을
융합시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고,
다양한 인종과 집단들이 모여
'미국과 미국인'이라는 하나의 정체성을
창조해내는 용광로(melting pot)
같은 측면이 하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다양한 인종 및 집단들이
서로를 질시하고 갈등하며 결국 유색인종이나
소수 집단을 억압하는 도가니(crucible)다.
이 도가니는 만인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독립선언서의 정신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만인 평등의 기독교적 가치는 흑인 출입을
금하는 교회 앞에서 무색해졌다.
1960년대만 해도
‘for whites only(백인만 출입할 수 있음)’나
‘no blacks and dogs(흑인과 개는 사절)’와 같은
문구가 공공장소에 흔했던 미국이다.
1955년 12월 1일
오후 6시경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
백화점 재봉사 로사 파크는 녹초가 되어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1900년부터 몽고메리시에서는
인종에 따라 버스 좌석을 분리시키는
조례가 시행되고 있었다.
몽고메리시의 버스기사들은
백인 전용 좌석이 꽉 차면 관행적으로
흑인 승객들에게 좌석에서 일어나도록 요구해왔다.
당시 운전기사는 백인 좌석이 가득 차
두세 명의 백인 남성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로사 파크를 포함한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기사는 경찰을 불렀고 로사 파크는
인종 차별법인 짐 크로우법 위반 혐의로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 받았다.
흑인 지도자들은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이후 일 년 넘게
‘버스 안타기’ 운동을 전개했다.
흑인끼리 차를 태워주고
웬만한 거리는 걸어 다니고,
말을 타고 다니기까지 했다.
경찰은 불법승차, 불법호객,
불량배 단속 등을 핑계로 탄압했다.
마틴 루서 킹에 대한 살해 위협이 이어졌고
자택이 폭파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1956년 11월 13일,
연방법원은 버스에서의 인종 차별이
불법이라는 선고를 내렸다.
흑인 민권운동가 제시젝슨의 말대로
로사 파크는 “우리가 모두 일어서기 위해
그녀는 앉아야만 했던 것”이고,
마틴 루서 킹은
“우리 모두가 일어설 수 있도록”
앞장서 투쟁했던 것이다.
<<출처: 인물세계사>>
암살 위협 속에서도 두려움 없이
인권운동을 지원하다
1968년 3월 29일 마틴 루서 킹은
흑인 환경미화원들의 파업을 지원하기 위해
테네시주 멤피스를 방문했다.
궂은 날씨 탓에 일을 하지 못하고 귀가한
흑인근로자들은 2시간치 임금을 받은 반면,
함께 귀가한 백인 근로자들은
하루치 임금을 받았던 것.
마틴 루터 킹이 멤피스로 타고 가는
항공편에 대한 폭파 위협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기도 했다.
4월 3일 마틴 루서 킹은
메이슨 교회에서 자신의 생애
마지막 연설을 했다.
이 연설 말미에는
폭파 위협에 관한 언급이 나온다.
2월 4일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죽음을 예견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감돈다.
“내가 멤피스에 오려 했을 때,
사람들이 그 위협에 관해,
아니 지나간 위협에 관해 말하더군요.
우리의, 마음이 병든 백인 형제들이
나에게 어떤 일을 하려 할까요?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운 날들이 기다리고 있겠지요.
그러나 이제 나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나는 산정(山頂)에 올라봤으니 말입니다.
난 개의치 않습니다. 여느 사람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오래 살고 싶지만 인명은 재천이겠지요.
이젠 신경 쓰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 분은 제가 산정에 오르는 걸 허락했습니다.
그곳에서 굽어보았지요. 약속의 땅을 보았지요.
여러분과 함께 그곳에 가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밤 여러분께 알려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람으로서, 바로 그 약속의 땅에
반드시 도착하게 되리라는 걸 말입니다.
오늘밤 나는 행복합니다.
그 무엇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나는 어느 누구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눈은 주님께서 오시는 영광을 보았으니까요.”
<<출처: 인물세계사>>
멤피스의 로레인 모텔에
마틴 루터 킹은 4월 4일 오후 6시1분,
2층 발코니에 서 있다가 저격 당했다.
총탄은 그의 오른쪽 뺨을
뚫고 들어가 턱을 지나 척수를
망가뜨리고 어깨에 박혔다.
범인으로 체포된 인물은 제임스 얼 레이.
그러나 그가 범행 자백을 번복하면서
마틴 루터 킹 암살에 관한
갖가지 음모론이 제기됐고
논란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다.
이 위대한 영혼이 저격 당하기 전 발코니에서
한 마지막 말은(현장에 있던 제시 잭슨의 증언)
이러했다. "이봐 벤! 오늘 밤 '주여 이손을 잡아주소서'를
꼭 연주해주게나. 정말 멋지게 말이야."
그날 밤 행사에서 연주하게 되어 있던
벤 브랜치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마틴 루터 킹은 응급 처치를 받았으나
7시 5분 공식 사망 선고가 이루어졌다.
당시 나이 39세. 검시(檢屍) 결과
마틴 루서 킹의 심장은
60대 나이 상태였다고 한다.
불꽃같은 삶이 그의 심장을
너무도 빨리 태워버렸기 때문이었을까?
<<출처: 인물세계사>>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
미국의 연방 기념일이자 공휴일,
바로 '마틴 루터 킹의 날'이다.
2009년의 '마틴 루터 킹의 날'은 1월20일,
미국 역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버락 오바마의 취임 하루 전이었다.
이 날 오바마는 자원봉사에
동참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몽상가가 아니라 실천가이자 행동가였던 인물,
낮은 곳에서 변화를 위해, 나은 사회를 위해,
정의와 평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인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오늘 수백, 수천,
아니 수백만의 우리 미국인들이 바로 그 인물,
킹 목사의 뜻을 받들고 있습니다."
마틴 루터 킹의 심장은 지금도 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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