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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나의 여행/미국여행

미국 애틀랜타 여행:지미 카터 대통령 도서관&박물관( Jimmy Carter Presidential Library& Museum)방문!

by 홍나와 떼굴이 2020. 1.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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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 카터 대통령의 사적지는

미국 조지아주()

섬터 카운티(Sumter County)

플레인스(Plains)에 있다.

 

미국 제39대 대통령 지미 카터와 관련된

장소를 보호하기 위해 1987년 12월 23일 지정되었다.

 

주택, 소년 시절 농장 및 1976년 대선 기간 동안

선거운동 본부로 사용했던 기관차 차고 등이 있다.

 

플레인스고등학교로 사용되었던 건물은 현재

공원 박물관과 방문자센터로 쓰인다.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여행 10박 11일 일정 중

방문했던 지미 카터 전 대통령 도서관 & 박물관

소개해본다 함께 보자.

 

 

♣개방시간: 09:00~16:45(월~토요일)/

12:00~16:45(일요일)

 

♣휴무일 : Thanks giving Day/

Christmas Day/New Year's Day

 

♣가는 방법(대중교통): 버스 3번

[N. Highland Ave@Albion Ave]

정거장 하차 후 도보 5분

 

♣주소: 441 Freedom Pkwy NE, Atlanta.CTA

30307, United States

 

애틀랜타의 리틀 파이브 지구 한편에 위치한

지미 카터 대통령 도서관 & 박물관 입구

 

The Cartet Center라고 적힌

사진 속 간판을 지나면

넓은 부지의 공원 안에

지미 카터 대통령 박물관과

대통령 기록관으로 구성된

'카터센터'로 들어서게 된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로비가 위치해있고

왼쪽으로 사진 속 박물관 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가야 할 때를 아는 사람은 아름답다..

죽음 앞에서도 대범한 지미 카터

 

"멋진 인생이었다. 수천 명의 친구를 사귀었다.

흥분되고 모험에 가득 찬, 감사한 삶이었다.

이제 모든 것은 신의 손에 달려있음을 느낀다."

 

암세포가 뇌로 전이된 사실을 공개하는

  지미 카터(95. 사진) 전 미국 대통령의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차있었다.

 

기자회견장을 가득 메운 기자들을 향해

종종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다.

자신에게 과연 어느 정도의 시간이 남아있는지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카터 전 대통령의

태도는 더없이 침착하고 편안해 보였다.

 

성공적인 대통령은 아니었지만 미국 역사상,

아니 어쩌면 전 세계 정치 역사상 가장 성공한

퇴임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는 그는 죽음 앞에서도

거인의 풍모와 남다른 품위를 과시했다.

<출처: [푸른 여우가 본 세상]>

지미 카터는

미국민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능력 있고 국민을 이해하는'

정부의 건설을 간절히 원했다.

 

재임기간 중 그의 업적은 주목할 만하지만 

고유가, 고인플레이션, 세계정세의 긴장국면 속에서

카터 행정부가 그러한 국민의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제임스 얼 카터 2세'라는 본명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그는

1924년 10월 1일 조지아

플레인스에서 출생했다.

 

그의 성장기는 땅콩 농사,

정치에 관한 토론,

돈독한 침례교 신앙심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조지아공대를 졸업한 후에

1946년 메릴랜드 아나폴리스에 소재한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로잘린 스미스와 결혼했다.

 

카터 부부는 존 윌리엄(잭), 

제임스 얼 3세(칩), 도넬 제프리(제프),

에이미 린 4남매를 두었다.

 

해군 장교로 7년 간 복무한 뒤

카터는 플레인스로 되돌아왔다.

 

1962년 그는 조지아 주 정치무대에 진출했고

8년 후에는 조지아 주지사로 당선되었다.

남부의 젊은 정치신인

주지사들 사이에서 카터는

환경, 정부 효율, 인종 장벽의 

철폐를 주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12월 카터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고

그 후 2년 동안 선거운동을 통해

지지기반을 점차 늘려갔다.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그는

제1차 투표로 대통령 후보에 지명되었다.

 

그리 러닝메이트에는 미네소타의 월터 F. 

먼데일 상원의원이 선택되었다.

 

카터는 현직 대통령이었던 제럴드 R. 포드와

세 차례에 걸쳐 토론을 벌이며

강력한 선거유세를 진행했다.

 

카터는 선거인단 수에서

297 대 241로 포드를 눌렀다.

 

이 사진은 지미 카터 대통령의 이웃들

카터는 진정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던 인플레이션과 실업을

안정시키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그 결과 그의 임기말에는

8백만에 이르는 신규 일자리 창출과

GDP 대비 재정적 자폭 감소를

결과물로 내세울 수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당시 인플레이션과 금리는

사상 최고 수준에 육박해 있었고

문제 해결을 위한 정부의 조치들은

단기적인 경기후퇴를 불러왔다.

 

카터 행정부는 국내문제에서

적지 않은 공적을 세웠다고

평가할 수 있었다.

그는 국가차원의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고

국내 유가를 자유화하여 생산을 장려함으로써

에너지 부족 사태에 대처했다.

 

그는 공무원 조직 개혁을 통해 

정부효율을 개선시켰고

화물운송과 항공산업에

대한 규제를 풀었다.

 

환경을 개선시키려는

노력도 병행되었다.

 

기존의 국립공원 체계를 확대시켜

알래스카 지방의 1억 3백만 에이커가

보호구역으로 추가 지정되었다.

 

인적, 사회적 제도 보완을 위해

교육부를 신설하고, 

사회보장제도를 강화했으며,

사상 최대 규모로 여성, 흑인,

히스패닉계를 공무원으로 채용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 카터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확립했다.

 

소련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은 카터의

인권 옹호론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1978년 캠프 데이비드에서의 

평화협상을 통해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의

중동분쟁이 화해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파나마 운하 조약의 인준도 얻어냈다.

전임 대통령들이 닦아놓은 기반을 토대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으며

소련과의 SALT ll 전략핵무기제한협상이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심각한 난관들도 있었다.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SALT ll 협상 인준 계획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이란 과격분자들에 의한 미 대사관

인질 사건은 카터 행정부의 마지막

14개월 동안 언론 지상을 뜨겁게 달구었다.

 

국내 인플레이션 문제와 함께

이란 인질 사건의 여파는 카터가

1980년 대선에서 패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순간에도 카터는 인질 생환을 놓고

어려운 협상을 벌이고 있었다.

 

마침내 이란은 카터가 백악관을

떠나는 날 52명의 인질을 석방했다.

 

결혼 76주년 전 미 카터 대통령 부부

"상대방 존경이 오랜 결혼생활 비법"

 

 

지미 카터 전 미 대통령과

부인 로잘린 카터 여사가 올해

7월 7일로 결혼 76주년을 맞이한다.

 

1946년 7월 7일 이들이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결혼할 당시 카터 전 대통령은

21살, 로잘린 여사는 18살이었지만

이제 이들은 96살과 93살이 됐다.

 

이 부부는 "서로에 대한 존경이 오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라고 말했다.

 

이들은 또 각자 별개의 영역에서 일하는 동안

상대방에게 충분한 공간을 주었다고 밝혔다.

 

카터 부부는 플레인스의 자택에서

결혼 76주년을 보내고 있다고 한다.

 

애틀랜타에 있는 카터 대통령 도서관 및

박물관은 카터 부부에게 축하 카드를

보낼 것이라고 밝혔다.

 

카터 부부의 결혼 생활은 조지 H W 전 대통령과

부시 여사에 이어 전 미 대통령 부부들 

가운데 2번째로 오래됐다.

<카터재단의 탄생>

 

카터는 장기간의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외교정책의 실패 등으로 인해 

대통령 재선에 실패했다.

 

그 당시 카터는 56세에 불과했다.

통계상으로 그의 수명은 여전히 

25년이나 남아 있는 셈이었다.

 

카터는 그의 부인 로잘린

(Eleanor Rosalynn Smith Carter)과 함께

은퇴 후의 삶에 대해 여러 날을

치열하게 고민했다.

오랜 고민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카터재단이었다.

 

카터재단의 설립은 1982년 

에모리 대학교(Emory University)의

총장인 레이니(James Laney) 박사의

제의를 수용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레이니 총장은 어떤 경우에도 카터의 견해가

제약당하거나 검열받지 않을 것임을

확실하게 보장해 주었다.

 

이에 1982년 에모리 대학교와의 파트너십 하에,

지미 카터와 로잘린 카터를 공동 설립자로 하는

비영리 비정부기구(NGO)로서의 

카터재단이 공식 출범하게 되었다.

 

카터는 재단 설립 초기에 몇 가지 중요한

운영 원칙을 다음과 같이 수립했다.

 

당대에 존재하는 각종 정부 산하기구,

국제기구, 비정부기구 등의 수행 업무와

중복되는 일을 펼치지 않는다.

학술적 분석에 머물지 않는

실천기구가 된다.

 

백악관의 묵인을 얻지 못하는 

민감한 분야에 무턱대고 개입하지 않는다.

목표가 소중한 경우 실패의 위험성을 

고려하지 않고 과감히 도전한다.

 

카터재단은 이상과 같은 목표와 운영 원칙하에

현재까지 80개국 이상에서 삶의 질 향상에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카터재단은 "평화의 유지, 질병과의 투쟁, 희망의 구축

(Waging Peace, Fighting Disease, Building Hope)”을

재단의 상징적 표어로 내세우고 있는데, 실제로 

이 표어에 걸맞게 세계 곳곳의 

소외된 지역에서 분쟁을 해결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며, 질병을 퇴치하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워 왔다.

카터센터 뒷편에 자리한 넓직하고 고요한 정원과 연못

 

 

퇴임 후가 더 아름다운

지미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한 모든 것이

(JIMMY CARTER PRESIDENTIAL LIBRARY & MUSEUM)에

기록되고 보관되고 전시되어 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조지아주 애틀랜타 

최고의 관광명소 중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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